[빨간날]허름한 빵집에 장인이 산다

머니투데이 유승목 기자 2018.07.1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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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네 빵지순례기(記)-④]24년차 동네빵집 ‘로베쟈’...알고보니 일본유학 실력파 명장의 빵

편집자주 '빵지순례'란 말 아십니까. '빵'과 '성지순례'를 합친 말인데요. 맛있는 동네빵집 돌아다닌다는 뜻입니다. 멀리 제주까지 가기도 한답니다. 그만큼 요즘 빵순이, 빵돌이들이 많아졌다는 뜻인데요. 어느정도냐면요. 국민 1인당 1년간 빵을 90개 먹는다고 하고요. 제과점업 매출은 최근 4년간 50% 늘었다고 합니다. 2015년에는 빵 매출이 쌀 매출을 앞지르기도 했습니다. '밥심(心)' 대신 '빵심(心)'이란 말을 쓸만도 합니다. 빵순이, 빵돌이들을 위해 서울에 개성 있는 동네빵집들, 한 번 모아 봤습니다. 빵 굽는 냄새 솔솔 나시나요.

/사진= 유승목 기자/사진= 유승목 기자


[빨간날]허름한 빵집에 장인이 산다
삼시세끼를 해결할 때 밥만큼 많이 찾는 것이 바로 빵이다. 오래 전 간식거리에 불과하던 빵은 이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빼놓을 수 없는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빵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며 자연스럽게 깔끔하고 균일한 맛을 제공하는 프랜차이즈 빵집이 성장했다. 아무래도 촌스러워 보이는 동네 '빵집'보다는 '베이커리', '파티세리' 등 세련된 이름과 화려한 맛에 끌리는 것. 실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발표한 '2018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 보고서- 빵류 시장'에 따르면 전체 빵집 매출 5조9천388억 중 프랜차이즈 빵집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60%(3조6천34억)에 달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시 동네 빵집을 찾고 있다. 단순히 집 근처라서가 아니다. 동네 빵집에선 획일화된 맛이 아닌 갓 구운 빵의 깊은 풍미와 독특하고 건강한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빵 매니아들은 소문난 동네 빵집을 찾아 '빵지순례'(빵과 성지순례의 합성어)를 하기도 한다.

◇빵 냄새 맡은 나그네 모이는 곳= 지난 9일 찾은 강남구 대치동 휘문고등학교 건너편에서 2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베쟈 빵집'은 장인의 손맛이 묻어있는 대표적인 동네 빵집이다. 불어로 여행객들이 머무는 숙소를 뜻하는 '로베쟈'라는 이름은 여기저기 손때가 묻고 작고 허름한 빵집과 잘 어울렸다. 빵집을 운영하는 이용숙 라미듀코리아 대표는 "나그네들에게 빵을 대접하는 숙소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빵을 찾는 사람들의 쉼터인 셈이다.
/사진= 유승목 기자/사진= 유승목 기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임에도 동네 주민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휘문고를 졸업한 박모씨(27)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7년이 지났고 더 이상 이 동네에 살지 않지만 가끔 친구를 만나러 올때마다 로베쟈빵집에 들른다. 박씨는 "고등학교 시절 동네 빵집이라고만 생각했을때는 몰랐는데 프랜차이즈 빵을 먹어보니 이곳 빵이 정말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부모님도 가끔 말씀하셔서 종종 들러 빵을 사간다"고 말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중학생 이모양(14)도 학원 가는 길에 알록달록한 머랭(달걀과 설탕 및 향신료를 섞어 만든 과자)을 보고 가게를 찾았다. 친구와 먹겠다며 머랭을 잔뜩 고른 이양은 이 대표가 치즈 바게트까지 덤으로 얹어주자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학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밖에도 맛있고 건강한 빵을 먹기 위해 자녀의 손을 잡고 방문한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비단 동네 주민 뿐 아니라 멀리 지방에서도 동네 빵집의 바게트를 찾는다. 이날 이대표는 택배 배송과 지방 고객의 주문으로 연신 휴대전화가 울리는 통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 대표는 "이 곳에서 오래 살다가 멀리 이사간 사람들이나 지인, 친척의 소개를 받고 빵을 먹어본 사람들도 멀리서 주문을 한다"고 웃음을 지었다.
/사진= 유승목 기자/사진= 유승목 기자
◇중요한 것은 '성실'과 '청소'= 72시간 동안 숙성시키고 돌오븐으로 구운 천연 발효빵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로베쟈빵집만의 매력이다. 무냉동과 무첨가제는 물론 버터와 우유 생크림 100% 사용도 1996년 처음 빵집을 오픈할 때부터 이 대표가 변함 없이 지켜온 빵집의 원칙이다. 대부분의 재료는 빵집 지하에 마련된 130평(약 430㎡)의 공장에서 가공·생산한다.

이 대표는 "발효에 3일이나 걸려 번거롭지만 맛과 풍미 자체가 일반 빵과 다르다"며 "특히 식사빵은 맛 뿐 아니라 건강까지 풍요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돌오븐에서 구워진 천연발효빵은 계량제 없이도 봉긋한 모양을 갖췄고 크로아상은 일반 프랜차이즈 빵집과 달리 연하고 노릇노릇한 색을 띤다.


이렇듯 건강한 천연 발효빵에 대해 사람들이 모르던 시절부터 지켜온 원칙은 이 대표의 제빵 철학에서 비롯됐다. 이 대표는 일본 명문 제과학교인 동경제과학교를 한국인 여성 최초로 수료한 제빵사다. 대학에서 일어일문학과를 전공하고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한 이 대표는 자신의 비전을 찾기 위해 어릴적부터 뛰어났던 손재주를 살려 제빵의 길을 택하고 1985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혈혈단신으로 고생스럽게 빵 만드는 법을 배운 만큼 이때부터 항상 제대로된 빵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진= 유승목 기자/사진= 유승목 기자
이 대표는 90년대에 '쁘띠치즈'와 '미니크로아상'을 최초로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빵을 간식거리로 생각하던 한국 사람들에게 식사빵이나 큰 바게트는 부담스러웠다. 이를 파악한 이 대표는 간식거리로도, 식사 대용으로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쁘띠치즈와 미니크로아상을 도입했다. 이 대표는 "1년쯤 지나니 다른 빵집에서도 만들더라"며 "사람들이 다양한 빵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것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최근 이 대표는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직원들이 더 나은 환경을 경험해보도록 일본 연수를 돕기도 하고 직원들에게 근로 시간을 줄여서라도 야간대학에 다니도록 다그치기도 한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제자만 해도 30명이 넘는다. 이 대표는 "제빵의 길로 들어서며 가졌던 꿈을 간직하는게 쉽지 않다"며 "치열하게 겪어봤기에 후배들에게 조금 더 나은 길을 터주고 싶다. 좋은 제빵사가 많아지면 소비자들도 더 맛있고 건강한 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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