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날] 대형빵집 물리친 30년 된 '수락산 빵'의 힘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2018.07.1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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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네 빵지순례기-②]서울 노원구에서 동네빵집 운영한지 29년… '민부곤 과자점'의 민부곤 제과기능장 인터뷰

편집자주 '빵지순례'란 말 아십니까. '빵'과 '성지순례'를 합친 말인데요. 맛있는 동네빵집 돌아다닌다는 뜻입니다. 멀리 제주까지 가기도 한답니다. 그만큼 요즘 빵순이, 빵돌이들이 많아졌다는 뜻인데요. 어느정도냐면요. 국민 1인당 1년간 빵을 90개 먹는다고 하고요. 제과점업 매출은 최근 4년간 50% 늘었다고 합니다. 2015년에는 빵 매출이 쌀 매출을 앞지르기도 했습니다. '밥심(心)' 대신 '빵심(心)'이란 말을 쓸만도 합니다. 빵순이, 빵돌이들을 위해 서울에 개성 있는 동네빵집들, 한 번 모아 봤습니다. 빵 굽는 냄새 솔솔 나시나요.

12일 찾은 GS슈퍼마켓 상계점 내 민부곤 과자점 분점에서 민부곤 제과기능장이 만들어진 빵을 살피고 있다. /사진=이재은 기자12일 찾은 GS슈퍼마켓 상계점 내 민부곤 과자점 분점에서 민부곤 제과기능장이 만들어진 빵을 살피고 있다. /사진=이재은 기자


[빨간날] 대형빵집 물리친 30년 된 '수락산 빵'의 힘
흰 살결 위 도도하게 살짝 올려진 딸기잼으로 마무리 된 '화이트셸' 쿠키를 입에 넣는다. 과하게 달지 않아 좋단 생각이 드는 찰나 묵직한 버터향이 밀고 들어와 여운을 남긴다. 이번에는 한껏 부푼 '베이비슈'를 베어문다. 위에 얹힌 비스킷이 소보루처럼 아삭아삭 식감을 더한다. 한 입 베어물 때마다 터질듯 꽉 찬 생크림이 튀어나와 입 주변에 마구 묻는다. 쉴 새 없이 다음 목표물, '호두캐러멜'로 손이 향한다. '바삭' 깨물자 신선한 호두가 반으로 갈라진다. 호두를 반투명하게 뒤덮은 캐러멜이 살짝 녹아 단맛을 더한다.


서울시 노원구 상계9동 보람상가 1층에 위치한 30년된 터줏대감, '민부곤 과자점'의 대표 메뉴들이다. 민부곤 과자점은 1989년 문을 열어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같은 상가에 크라운, 뚜레쥬르 등 프랜차이즈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10m 거리의 짧은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GS슈퍼마켓의 빵집도 10년을 버티다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민부곤 과자점' 분점이 들어섰다. 동네 빵집이 '필패'한다는 프랜차이즈 빵집과 대형마트의 공세를 이겨내고, 오히려 그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한 것이다.



기적을 이뤄낸 중심엔 대한민국 제과기능장이자 대한제과협회 검증 '한국프로 제빵왕'인 민부곤 파티시에(65)가 있다. 민 기능장을 만나러 지난 12일 오후 7시 '민부곤 과자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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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낮에 찾아갔을 땐 빵을 만드느라 정신 없었고, 밤 늦게까지 일하니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겨우 짬을 낸 민 기능장 옆에 서서 두 시간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작업장에 잠시 쉴 의자 하나 없어 당황하는 기자를 향해 그는 "아, 보통 앉아서 인터뷰하시나…나는 밥 먹을 때 빼곤 앉아있는 일이 없어서 앉는 게 잘 상상이 안되네"라며 웃어보였다.

'빵에 미친 사람'. 그의 말을 빌린 것이다. 잠시라도 앉아서 쉬거나, 집에 돌아가서 TV를 보고 있을 때면 빵을 만들어야할 것 같은 생각에 다시 작업장으로 향한다. 29년간 매일같이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그의 청춘을 '민부곤 과자점'에 다 바쳤다. 그는 이날도 대화 도중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다음날 쓸 효모 발효종을 만들며 "이 정도 양이면 내일 하루 영업할 때 쓸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기자가 시큼한 냄새에 몇 발자국 떨어지자 그는 "이스트를 사용해 인위적으로 부풀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걸 써요. 물이랑 밀가루만 넣어 24시간 숙성하면 이렇게 발효종이 됩니다. 건강에 더 좋아요"라고 설명했다. 그의 빵을 어린 손자에게도 먹인다. 당연히 빵에는 유기농 밀가루와 마스코바도 설탕(필리핀 전통 재래방식으로 생산한 설탕, 화학적 정제처리를 하지 않아 미네랄이 그대로 들어 있다)만 사용한다.



그렇다기엔 값이 너무 저렴해 걱정스러웠다. 요즘 광화문이나 이태원 등 '핫'하다는 곳에서 파는 유명 빵값에 익숙해진 기자에겐 빵값이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8개 들이 베이비슈는 4000원, 화이트셸 쿠키는 7000~8000원, 아몬드 쿠키는 7000원이다. 그러자 그는 "내가 기능장이고, 내 노동의 가치를 아는데 왜 돈을 안 남기고 팔겠어요. 이정도 남기고 팔면 되는 것이지"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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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 제빵 실력에만 자부심이 있는 게 아니다. 노원구민들이 오랫동안 사랑해줘 가능했던 '노원의 가장 오래된 빵집'을 운영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던 1989년, 노원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새로 개발되는 신도시에 하나 둘 아파트가 들어서는 걸 봤다. 엄마 손을 잡고와 빵을 먹던 아기는, 이제 본인의 아기를 데려와 그의 빵을 먹인다.

"여기 노원에 대한 애정이 참 커요, 내가. 여러 가게가 생기고 사라지고, 또 어렸던 사람들이 나이들어서 또 찾아오고 하는 걸 볼 때마다 참 '여기서 빵을 만들길 잘했다' 이런 생각을 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에 대한 애정을 담아 '수락산빵'도 만들었다. "'몽블랑' 케이크 알죠? 프랑스어로 '하얀 산'이란 뜻인데, 알프스의 몽블랑 산맥을 본 따 만들었다는데, 나도 우리 노원의 명물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보자 하다가 '수락산빵'을 만들었습니다." 햄과 치즈가 들어간 '수락산빵'은 주변 청원중학교 학생들이 즐겨 찾는다.

그는 꾸준히 사랑 받는 과자점이 되고싶어 해외로 나가 빵집도 자주 둘러본다. 일본에서 장인들이 수 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빵집을 볼 땐 부러웠다고 한다. "내 청춘을 다 바친 이곳이 오래오래 노원에 남아서 꾸준히 사랑을 받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딸한테 물려주기로 했지만 계속 잘 돼야 물려줄텐데… 확실히 국민들 생활살이가 어려워졌는지 옛날에 비해 빵도 덜 팔려요."


그의 첫째 딸은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빵을 공부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확신이 없다. 혹여 가업을 이어줬다가 귀한 딸을 고생시키는 게 아닐지 걱정돼서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소상공인 정책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정부가 전통시장 살리기에 힘쓰는 등 여러 노력을 해줬어요. 앞으로는 지역의 명물로 기능하는 오래된 가게들에 힘을 써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죠"라고 말했다.
12일 GS슈퍼마켓 상계점 내 민부곤 과자점 분점에서 민부곤 제과기능장이 빵을 들고 환히 웃고 있다. /사진=이재은 기자12일 GS슈퍼마켓 상계점 내 민부곤 과자점 분점에서 민부곤 제과기능장이 빵을 들고 환히 웃고 있다. /사진=이재은 기자
경력으로 보면 남부러울 것 없는 파티시에지만, 아직도 '맛있다'는 말에는 아이처럼 웃음이 난다. 기자가 "호두 캐러멜도 맛있고, 킵펠 쿠키도 맛있더라고요. 인터넷에도 칭찬 글들이 있던데, 좀 보셨어요?"하자 그가 활짝 웃었다. 기자가 인터넷 글들을 전하자 그는 집중하며 "그렇구나, 젊은이들이 그런 글을 올려주는구나"라고 답하며 환히 웃었다. 인터뷰 내내 무뚝뚝했던 그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진부한 말이지만, 정말로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젊을 때처럼 꾸준히 도전하고, 민부곤 과자점이 오랫동안 노원의 자랑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GS 슈퍼마켓에 입점해 분점에선 조금 저렴한 빵을 팔아 소비자 폭을 확장한 것도, 2013년 노원의 동네빵집들이 모두 모여 '해피브레드'라는 협동 조합을 만든 것도 다 그 도전의 일환이다. 이제는 도봉구의 20여개 빵집과 합심해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민 기능장이 앞장서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는 의자 하나 없는 작업장에 서서 빵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모를테지만 오늘도 온라인엔 그의 과자점을 칭찬하는 글이 올라온다. "군대 휴가나왔다. 서울에 있는 유명 빵집 다 털었다. 오월의 종, 김영모 과자점, 나폴레옹 제과점, 베즐리, 에릭케제르, 패션5, 쌀람 베이커리… 다 다니면서 30만원 어치 빵 사먹었다. 근데 민부곤 과자점 잘 아는 사람있나? 책 '맛있는 빵집'에 나오는 42개 유명 빵집 리스트에도 오른 곳이다. 여기 왜 이렇게 가격이 저렴하고 맛있냐. 호두캐러멜 이건 진짜 맛있으니 먹어라." (온라인커뮤니티 'DC 과자·빵갤러리'에 올라온 '낼 휴가 복귀다'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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