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돈키호테와 삐에로

머니투데이 송지유 기자 2018.07.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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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일본은 1980년대 초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내며 경기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뒤를 이어 G2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하지만 1985년 플라자합의(엔화가치 절상) 후 상황이 급변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상항이 더 나빠졌다. 실질 GDP 증가율은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천정부지로 치솟던 집값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기업과 개인이 속출하면서 은행은 도산했다. 그렇게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됐다.

프랜차이즈 잡화점 '돈키호테'는 극심한 경기불황 속에서도 나홀로 성장한 일본 기업이다. 1989년 1호점을 선보인 후 29년간 매출 성장세가 꺾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저렴한 덤핑상품을 구해 할인판매, 야간영업, 압축진열하는 것이 돈키호테의 특징이다. 지난해말 기준 일본 전역에 368개 매장이 있다. 매출은 8288억엔(8조4200억원)에 달한다.



웬만한 일본 여행 책자에는 꼭 들러봐야 할 곳에 돈키호테가 포함돼 있다. 온라인에도 돈키호테 관련 콘텐츠가 넘쳐 난다. 과자부터 명품까지 없는 것이 없고, 무엇보다 저렴하니 일본 소비자 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쇼핑천국으로 통한다. 물건이 빼곡해 시야가 답답하고 통로가 좁지만 '최저가에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이 같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게 만든다.

한국에도 최근 돈키호테를 표방한 유통채널이 등장했다. 신세계그룹 이마트가 운영하는 '삐에로쑈핑'으로 서울 강남 스타필드 코엑스몰에 1호점이 들어섰다. 미국·일본·유럽 등 선진시장을 조사하던 정용진 부회장이 '돈키호테를 벤치마킹한 B급 감성 만물 잡화상'을 신사업으로 추진한다고 알려져 더 화제가 됐다. 대놓고 베꼈다고 하니 현장을 찾는 소비자들의 거부감도 없다. 특별한 마케팅을 하지 않았는데도 방문객들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블로그 등에 정보를 공유하면서 입소문이 났고, 온라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됐다.



'저도 그게 어딨는지 모릅니다'. 직원 유니폼에 새겨진 이 웃음 터지는 문구는 한국판 돈키호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좁은 공간에 물건이 그만큼 많다는 점을 어필하는 동시에 고객이 원하면 무엇이든 서비스해야 하는 백화점·대형마트 등 기존 유통채널과는 확실히 다른 노선이라는 점을 강조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실제 매장 구성이나 진열도 파격적이다. 주방용품 옆에 화장품, 그 옆에 전자제품이 있다. 고객이 보물찾기 하듯 원하는 물건을 찾아야 한다. 국내에선 다소 금기시 돼 있는 성인용품을 자연스럽게 들여놨고, 요즘 어딜 가나 죄인(?) 취급받는 흡연자들에게 널찍한 흡연공간을 내 준 것도 역발상이다.

돈키호테를 기본 포맷으로 국내 시장 상황을 반영해 재탄생한 이곳에는 방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주말에는 쇼핑객들이 한꺼번에 몰려 입장 제한이 불가피할 정도로 인기다. 신세계의 새로운 도전은 모바일·온라인 등에 밀려 수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백화점·대형마트 등 유통채널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제 오프라인은 끝났다", "매장에 손님이 안 온다" 등 업계의 자조적인 분석을 완전히 뒤집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경쟁 유통사들이 삐에로쑈핑 오픈 당일 이 현장에 직원들을 대거 투입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후문이다. 같은 사업장을 둘러본 이들이 각각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 한가지는 분명하다. 소비자 입장에선 일본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인기 유통채널을 국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실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송지유 산업2부 차장송지유 산업2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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