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스 8’, 기쁘지만 아쉬운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ize 기자 2018.06.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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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스 8’, 기쁘지만 아쉬운


* ‘오션스 8’의 내용이 포함 돼 있습니다.

케이퍼 무비의 유희는 멤버들의 개성과 능력치, 그리고 그들 사이의 화학작용, 관객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모의하는 공범의식, 계획을 구현시키는 과정에서의 긴장에 있다. 모두를 잠시 휘청거리게 만들 안팎의 변수는 필수며, 여기에 똘똘한 반전까지 더하면 쾌감은 극대화된다. 순수한 오락적 재미다. 하지만 ‘오션스 8’은 화려한 출연진과 영화의 화제성에 비하면 의외로 허술한 데가 많은 케이퍼 무비다.

‘개과천선’을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데비 오션(산드라 블록)이 가석방되고 술에 물 타서 장사하는 루(케이트 블란쳇)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흥분감은 고조된다. 무려 산드라 블록과 케이트 블란쳇이 만나 어떤 예술적인 한탕을 벌일까. 얼마나 차원이 다른 도둑질을 할까. 데비가 출소 후 백화점과 호텔에서 벌인 소소하지만 능란한 사기 쇼는 본 게임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그러나 데비가 독방에서 5년 8개월 넘게 구상했다는 계획은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고 있다. 톱스타 다프네(앤 해서웨이)가 디자이너 로즈(헬레나 본햄 카터)를 고용하지 않으면 애초에 성립 불가한 작전이다. 그러나 다프네는 고분고분하게 덫에 걸린다. 라이벌 동료 배우가 관심을 보이는 로즈를 선점하겠다는 욕망 때문이다. 일은 착착 진행된다. 패션 매거진 ‘보그’에 임시 취직해 만능키로 활약하는 태미(사라 폴슨), 작전이 개시될 때조차 태연히 페디큐어를 바르고 있는, 도무지 긴장과 실수가 없는 해커 나인 볼(리한나), 보석 전문가치고는 연기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은 아미타(민디 캘링)가 사소한 예외 상황들을 물샐 틈 없이 방어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안심해버린다. 그들은 어떻게든 승리할 것이다.

그나마 목표물인 1억 5천만 달러짜리 투생 목걸이가 특수자석으로만 풀린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외적 변수인데, 이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도 지극히 간단하다. 나인 볼이 갑자기 자신보다 더 천재이자 외부 인물인 동생을 호출한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해 주인공들보다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선보이는 보험 수사관(제임스 코든)의 활약은 잠시 극에 갈등의 그늘을 드리우는 듯하나 이내 쉽게 해소된다.



‘오션스 8’은 큰오빠 격인 ‘오션스’ 시리즈의 자장 안에 있음을 데비의 오빠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의 존재를 수차례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오션스’ 시리즈의 주요한 장점들은 이식받지 못했다. 새로운 팀의 리더인 데비와 루는 대니와 러스티(브레드 피트)가 보여준 끈끈한 호흡과 장악력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한다. 지난 ‘오션스’ 시리즈는 그 안에서 성장하는 라이너스(맷 데이먼) 등 모든 멤버가 또렷한 인상을 남긴다. 그들 사이엔 ‘오션스 8’ 팀에는 없는 드라마가 있다. 또한, 대니에게는 기본 원칙이 있었다. 무고한 사람의 금품을 털지 않는다. 그 덕택에 범행 타깃은 자연스럽게 악당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범죄에 최소한의 정당성이 생기니 멤버들은 해피엔딩을 맞이할 지위도 얻는다. 하지만 ‘오션스 8’의 타깃은 인물이 아닌 사물이다. 투생 목걸이에는 그 어떤 캐릭터도 없다. 단지 ‘까르띠에’만 억울할 뿐이다.

무엇보다 ‘오션스 8’의 가장 큰 아쉬움은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는 진부한 시선이다. 지금껏 여성을 교묘하게 따돌려 온 할리우드에서 멤버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한 케이퍼 무비를 기획했다는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사건이다. 관객은 이미 응원할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표지와는 달리 내용은 여전히 구식의 젠더 감수성에 머물러 있다. 우선 범행이 벌어지는 장소는 호사스러운 ‘패션쇼’다. ‘여배우’는 외모에 집착하고 질투가 많으며 백치미가 흐른다는 편견을 버젓이 소비한다(이것은 반전으로도 면죄부를 얻지 못한다). 데비는 여성 관객들을 의식하듯 “어디든 못 갈까”, “세상 어디선가 범죄자가 되길 꿈꾸는 소녀를 위해”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이건 거의 기계적 호소에 가깝다. 정작 데비는 전 남자친구에 대한 복수심, 오빠 대니와 오션 가문에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발목 잡혀 있는 인물이 아닌가. 작전을 끝마친 멤버들이 눈부신 드레스로 갈아입고 의기양양하게 레드카펫을 밟을 때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이후 그들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 보여주는 에필로그 장면은 이제 막 자아 찾기에 나선 어린 여성들이 등장하는 걸 그룹 뮤직비디오에나 걸맞은 이미지에 그치고 만다. 케이트 블란쳇이 그저 터프하게 바이크에 올라탄다고 해서 여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션스 8’은,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려는 여성의 주체적 운동을 결국 보수적이고 상업적인 자본 논리로 환원해버리는 ‘시장 페미니즘’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젠더 스와프’ 영화의 출현은 반갑지만, 마냥 감지덕지하며 환호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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