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진 아마노코리아 대표/사진=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
자타 공인 애주가. 전명진 아마노코리아 대표를 만났다. 그는 참말로 '술 장(腸)'이 따로 있는 이 같다. 매일 마실뿐더러 그 양도 적지 않아서다. 몸이 버텨내느냐란 물음에 그는 "조금 일찍 시작한다"면서 "8~9시면 귀가해 잠을 푹 자는 편"이라고 했다.
"인터뷰인데 술이 도움 됐다고 하면 안 되겠죠. 하하"
"술이요? 술이 뭐 어떻게..."
1990년대 초 일본 아마노 본사에서 신입사원으로 근무할 땐 상사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상사들은 퇴근 후면 늘 전 대표를 찾았다. 술을 워낙 맛나게 마셔서다. 이는 많은 상사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결국 그 상사들은 훗날 전 대표가 아마노코리아 사장이 되는 데 힘을 보탠다.
술도 술이지만 그 행간엔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과 어울렸고 그에겐 늘 진솔함이 묻어났다. 작은 인연도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진정성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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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표는 전북 군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부도 곧잘 했지만 고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방황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이슥도록 잠 못 들며 괴로워했던 까닭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에야 알게 됐다. 그의 생모는 다름 아닌,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던 분이었다. 복잡했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대학 입시 한 달 앞두고는 아버지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갔다. 공부가 뒷전이었던 전 대표만 고향에 남아 전북대에 진학한다. 대학에 가서도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해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군대부터 다녀오자.' 해군 35개월. 배를 탔다.
전 대표는 손재주가 좋다는 걸 군대에서 처음 알게 됐다. 취미로 군함 모형 등을 만들곤 했는데, 남달랐던 것이다. '손재주로 뭔가 할 게 없을까'라고 고민하던 찰라 잡지를 통해 '미용'이란 걸 접한다. '앞으론 남자 미용사가 대세'란 글귀도 언뜻 보였다. 1986년 제대 바로 다음 날 미용학원에 입학했다. 시험 항목은 커트·파마·드라이·신부화장, 네 가지. 2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미용자격증을 땄다.
'꽃길'이 펼쳐질 거라 예상했다. 기술자로 대우받으면서 돈도 벌 줄 알았다. 이게 웬일인가. 미용사로 취직했지만 할 일이 없었다. 당시 군산에선 남자 미용사가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남자인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심지어 머리 감겨 주는 것도 싫어했다. 항상 둘 중 하나였다. 일주일 만에 쫓겨나거나, 일주일 만에 도망 나오거나.
안 되겠다 싶어 1987년 군산에 미용실을 하나 차렸다. 지인을 통해 여자 미용사도 불러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용실로 배달되는 일본 잡지가 눈에 들어온다. 일본 헤어 기술들은 보기에 좋았다. '일본으로 가서 미용 기술을 배우리라.' 이 모든 과정이 대학 재학 중의 일이다. 대학 4학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1년 동안 일본 내 일본어학교에서 말부터 익힌 뒤 본격적으로 미용 기술을 배울 작심이었다.
일본어학교 6개월 차쯤 됐을까. 전 대표는 A여사가 떠올랐다.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 전 대표가 A여사를 만난 건 고향인 군산에서 일본어 학원에 잠시 다닐 때였다.
A여사는 1932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한국말은 전혀 못했다. 어릴 때 줄곧 일본어만 쓰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탓이다. 고향이 그리워 해마다 군산을 찾는 이였다.
A여사는 그날도 군산에 온 김에 일본어 학원을 찾았다. 학원장이 어릴 적 친구였던 것이다. 원장은 학생들에게 요청했다. "혹시 오늘 A여사 가이드 좀 해 줄 사람?" 전 대표는 일본어도 배울 겸 해서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모시고 다니겠습니다." 이날 하루의 인연이 뒷날 전 대표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는다.
"저 일본에 온 지 6개월쯤 됐어요. 어디 사세요?" 그 뒤로 A여사는 전 대표를 수시로 찾아와 아들처럼 챙겼다. 어느 날이었다.
"내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국대사관 한국어 교실을 다니고 있어. 거기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마노'란 큰 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청년이 있으면 소개하라는데, 면접 한번 봐."
일본 상장기업 아마노가 한국대사관에 구인 의뢰를 했던 것이다. 전 대표는 거절했다. "저는 미용을 배우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요."
A여사의 성화는 계속됐다. 하루는 못 이기는 척하며 면접 장소로 향했다. 아마노 측에선 "당신은 대학 졸업 전이어서 워킹 비자가 안 나오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되는데, 혹시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겠냐"고 제안했다. 전 대표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마노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1년 학교 졸업과 동시에 전 대표는 아마노의 정식 직원이 됐다. 아마노의 외국인 1호 직원이었다. 처음 몇 년간은 갈등도 많았다. 신입사원이라면 흔히 겪는 매너리즘에 빠져서다. 사직서는 책상 안에 늘 대기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회사 내 유일한 한국인인 전 대표가 바빠질 일이 터졌다. 한국 내 아마노 대리점이 부도난 것이다.
이에 따라 전 대표와 그의 상사인 아마노 직원 2명(일본인)은 한국으로 파견 오게 된다. 대리점을 정리하고 1996년 그렇게 설립한 게 지금의 아마노코리아다. 함께 온 상사 2명 중 한 명이 초대 사장을 맡았다. 2000년까지 사장이 3명이나 바뀌었다. 2001년, 전 대표가 결국 아마노코리아의 수장이 된다. 당시 직원 수는 14명에, 매출액은 29억원에 불과했다.
아마노코리아의 매출액 추이 그래프/사진제공=아마노코리아
특히 매출액 그래프는 눈부시다. 우상향 곡선이 지난 17년 동안 단 한 번도 꺾인 바 없다. 지난해엔 853억원을 기록했다. 전 대표는 올해엔 1000억원을 무난히 넘길 것이라고 했다.
아마노코리아의 성장 동력은 '사람'(직원)이다. 대개 중소기업들의 가장 큰 애로가 인재난이다. 인재를 뽑는 것도 힘들지만 실컷 가르쳐 이제 일 좀 하겠다 싶으면 떠난다.
아마노코리아의 경우 임직원 수가 꽤 되지만 이직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니 상당수 직원들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베테랑이 됐다. 회사 초창기 멤버들 또한 거의 모두가 전 대표 곁을 지키며 한자리씩 하고 있다. 전 대표는 신입 직원을 뽑을 때 학벌, 지역 등을 한 번도 본 적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들이 모두 10년 이상씩 근무하면서 베테랑이 된 것이다.
전 대표의 삶에는 늘 술이 있었고 잔을 함께 기울일 사람, 직원들이 있었다. 그는 술잔에 술만 안다미로 채우지 않는다. 진솔함을 함께 담는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그러하다. 그래서 그에겐 사람이 많다. 잘 떠나지도 않는다. 리더가 좋아 리더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최고의 리더십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