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스토리]"매출 20억원대 회사, 1000억원으로 키워"

머니투데이 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 2018.05.2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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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진 아마노코리아 대표, 미용기술 배우러 日 갔다가 아마노 만나... 주차 장비 국내 최고 기업 우뚝

전명진 아마노코리아 대표/사진=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전명진 아마노코리아 대표/사진=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


주유별장(酒有別腸). 술맛을 돋우는 메뉴가 있어 한 번씩 들르는 퓨전한식 주점의 이름이기도 하다. 원래 이 말은 '술을 마시는 사람은 창자가 따로 있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자타 공인 애주가. 전명진 아마노코리아 대표를 만났다. 그는 참말로 '술 장(腸)'이 따로 있는 이 같다. 매일 마실뿐더러 그 양도 적지 않아서다. 몸이 버텨내느냐란 물음에 그는 "조금 일찍 시작한다"면서 "8~9시면 귀가해 잠을 푹 자는 편"이라고 했다.



전 대표는 아마노코리아를 주차관제시스템 분야 국내 1위 기업으로 키워 낸 인물이다. 매출액 20억원대 회사를 1000억원 규모로 성장시켰다. 회사가 이만큼 큰 배경이 뭐냐고 그에게 물었다.

"인터뷰인데 술이 도움 됐다고 하면 안 되겠죠. 하하"
"술이요? 술이 뭐 어떻게..."



"저는 술을 참 맛있게 먹는 사람 중 한 명이거든요. 따라주는 대로 족족 마시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저를 찾았어요."

1990년대 초 일본 아마노 본사에서 신입사원으로 근무할 땐 상사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상사들은 퇴근 후면 늘 전 대표를 찾았다. 술을 워낙 맛나게 마셔서다. 이는 많은 상사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결국 그 상사들은 훗날 전 대표가 아마노코리아 사장이 되는 데 힘을 보탠다.

술도 술이지만 그 행간엔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과 어울렸고 그에겐 늘 진솔함이 묻어났다. 작은 인연도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진정성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전 대표는 전북 군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부도 곧잘 했지만 고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방황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이슥도록 잠 못 들며 괴로워했던 까닭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에야 알게 됐다. 그의 생모는 다름 아닌,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던 분이었다. 복잡했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대학 입시 한 달 앞두고는 아버지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갔다. 공부가 뒷전이었던 전 대표만 고향에 남아 전북대에 진학한다. 대학에 가서도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해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군대부터 다녀오자.' 해군 35개월. 배를 탔다.

전 대표는 손재주가 좋다는 걸 군대에서 처음 알게 됐다. 취미로 군함 모형 등을 만들곤 했는데, 남달랐던 것이다. '손재주로 뭔가 할 게 없을까'라고 고민하던 찰라 잡지를 통해 '미용'이란 걸 접한다. '앞으론 남자 미용사가 대세'란 글귀도 언뜻 보였다. 1986년 제대 바로 다음 날 미용학원에 입학했다. 시험 항목은 커트·파마·드라이·신부화장, 네 가지. 2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미용자격증을 땄다.

'꽃길'이 펼쳐질 거라 예상했다. 기술자로 대우받으면서 돈도 벌 줄 알았다. 이게 웬일인가. 미용사로 취직했지만 할 일이 없었다. 당시 군산에선 남자 미용사가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남자인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심지어 머리 감겨 주는 것도 싫어했다. 항상 둘 중 하나였다. 일주일 만에 쫓겨나거나, 일주일 만에 도망 나오거나.

안 되겠다 싶어 1987년 군산에 미용실을 하나 차렸다. 지인을 통해 여자 미용사도 불러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용실로 배달되는 일본 잡지가 눈에 들어온다. 일본 헤어 기술들은 보기에 좋았다. '일본으로 가서 미용 기술을 배우리라.' 이 모든 과정이 대학 재학 중의 일이다. 대학 4학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1년 동안 일본 내 일본어학교에서 말부터 익힌 뒤 본격적으로 미용 기술을 배울 작심이었다.

일본어학교 6개월 차쯤 됐을까. 전 대표는 A여사가 떠올랐다.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 전 대표가 A여사를 만난 건 고향인 군산에서 일본어 학원에 잠시 다닐 때였다.

A여사는 1932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한국말은 전혀 못했다. 어릴 때 줄곧 일본어만 쓰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탓이다. 고향이 그리워 해마다 군산을 찾는 이였다.

A여사는 그날도 군산에 온 김에 일본어 학원을 찾았다. 학원장이 어릴 적 친구였던 것이다. 원장은 학생들에게 요청했다. "혹시 오늘 A여사 가이드 좀 해 줄 사람?" 전 대표는 일본어도 배울 겸 해서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모시고 다니겠습니다." 이날 하루의 인연이 뒷날 전 대표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는다.

"저 일본에 온 지 6개월쯤 됐어요. 어디 사세요?" 그 뒤로 A여사는 전 대표를 수시로 찾아와 아들처럼 챙겼다. 어느 날이었다.

"내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국대사관 한국어 교실을 다니고 있어. 거기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마노'란 큰 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청년이 있으면 소개하라는데, 면접 한번 봐."

일본 상장기업 아마노가 한국대사관에 구인 의뢰를 했던 것이다. 전 대표는 거절했다. "저는 미용을 배우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요."

A여사의 성화는 계속됐다. 하루는 못 이기는 척하며 면접 장소로 향했다. 아마노 측에선 "당신은 대학 졸업 전이어서 워킹 비자가 안 나오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되는데, 혹시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겠냐"고 제안했다. 전 대표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마노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1년 학교 졸업과 동시에 전 대표는 아마노의 정식 직원이 됐다. 아마노의 외국인 1호 직원이었다. 처음 몇 년간은 갈등도 많았다. 신입사원이라면 흔히 겪는 매너리즘에 빠져서다. 사직서는 책상 안에 늘 대기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회사 내 유일한 한국인인 전 대표가 바빠질 일이 터졌다. 한국 내 아마노 대리점이 부도난 것이다.

이에 따라 전 대표와 그의 상사인 아마노 직원 2명(일본인)은 한국으로 파견 오게 된다. 대리점을 정리하고 1996년 그렇게 설립한 게 지금의 아마노코리아다. 함께 온 상사 2명 중 한 명이 초대 사장을 맡았다. 2000년까지 사장이 3명이나 바뀌었다. 2001년, 전 대표가 결국 아마노코리아의 수장이 된다. 당시 직원 수는 14명에, 매출액은 29억원에 불과했다.

아마노코리아의 매출액 추이 그래프/사진제공=아마노코리아아마노코리아의 매출액 추이 그래프/사진제공=아마노코리아
17년이 지난 현재의 경영성적표는 어떨까. 올해 초 채용한 정직원만 50명이다. 본사 등에 근무하는 정규 직원은 270명. 주차장 운영 파트에 고용된 계약직 750명을 합하면 1000명이 넘는다. 무인주차·주차유도·노상주차 등을 아우르는 주차관제시스템 분야에서 국내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매출액 그래프는 눈부시다. 우상향 곡선이 지난 17년 동안 단 한 번도 꺾인 바 없다. 지난해엔 853억원을 기록했다. 전 대표는 올해엔 1000억원을 무난히 넘길 것이라고 했다.

아마노코리아의 성장 동력은 '사람'(직원)이다. 대개 중소기업들의 가장 큰 애로가 인재난이다. 인재를 뽑는 것도 힘들지만 실컷 가르쳐 이제 일 좀 하겠다 싶으면 떠난다.

아마노코리아의 경우 임직원 수가 꽤 되지만 이직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니 상당수 직원들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베테랑이 됐다. 회사 초창기 멤버들 또한 거의 모두가 전 대표 곁을 지키며 한자리씩 하고 있다. 전 대표는 신입 직원을 뽑을 때 학벌, 지역 등을 한 번도 본 적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들이 모두 10년 이상씩 근무하면서 베테랑이 된 것이다.

전 대표의 삶에는 늘 술이 있었고 잔을 함께 기울일 사람, 직원들이 있었다. 그는 술잔에 술만 안다미로 채우지 않는다. 진솔함을 함께 담는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그러하다. 그래서 그에겐 사람이 많다. 잘 떠나지도 않는다. 리더가 좋아 리더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최고의 리더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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