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천이나 박스 위에 몸을 뉘이고 조용히 잠을 청하는 노숙자도 있는 반면 삼삼오오 모여 술 마시며 큰 소리로 '천국'을 논하는 무리도 있었다. 한 노숙자는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바지 앞섶을 풀고 소변을 봤다. 광장 앞 길가에서는 경찰 2명이 횡설수설하는 노숙자 2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덧 올해도 초여름을 향하면서 거리에서 한뎃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서울역파출소 관계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노숙자들이 더 많이 밖으로 나온다"며 "추울 때 150명 정도이던 노숙자들이 날씨가 더울 땐 230명까지 늘어난다"고 말했다. 10년째 서울 영등포역파출소에서 노숙인 관리를 전담하고 있는 정순태 경위도 "추운 겨울에 50~60명 정도였던 영등포역 노숙자는 한여름이 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서울역 광장 앞 천막에서 진행된 한 종교단체의 예배에 노숙자들이 참여하는 모습. 날이 더워지고 야외 노숙이 가능해지면서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김영상 기자
이들을 위한 시설 자체가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추울 때 잠시 머물다 날씨가 풀리면 다시 거리로 나오는 패턴이 반복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가에서 관리하는 노숙인 생활시설은 전국 57개소,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는 재활센터만 60개소에 달한다. 노숙인의 보호·재활·자립 기반 조성을 위해 2012년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노숙인복지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적으로 시설이나 예산이 늘었다. 서울시 노숙인 지원 예산은 2011년 363억원에서 지난해 477억원으로 100억원 넘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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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숙인 수는 줄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하는 '노숙인 등 실태조사'에 따르면 행정자료 상 거리 노숙인 수는 2014년 1138명에서 2016년 10월 1522명으로 증가했다.
시설 생활 초기에 금연, 금주 등의 규칙적인 생활을 꺼려 다시 길거리로 나서는 노숙인들이 많다는 분석이다. 정 경위는 "거리 노숙인들은 통제당하는 걸 싫어하는데 시설에 들어가면 술도 못 마시고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등 자유로운 생활이 제한된다"며 "추운 겨울에는 몇 달 간 시설로 들어갔다가 날이 풀리면 다시 거리로 나온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시설 대신 알코올 등 각종 중독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들을 위한 정신과 치료나 자립을 위한 장기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숙인을 지원하는 서울시 산하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이수범 실장은 "한 시민이 노숙자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문제를 겪었으며 대부분 희망을 잃고 심신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라며 "노숙인이 거리생활을 벗어나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상처치료·심리치료·트라우마 극복·자존감 회복 등을 위한 트라우마극복센터나 심리치유센터를 신설해 노숙인의 정신적·정서적 피해회복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18일 지하철 서울역 화장실에 버려져 있던 대변 묻은 바지를 한 청소노동자가 치우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청소노동자는 "노숙자들이 역내 화장실 벽에 종종 변을 묻혀놓곤 한다"고 말했다. /사진=김영상 기자
이 관계자는 "일부 단체들은 거리 노숙인들의 (폭행, 강제퇴거 등) 인권 침해 문제만 강조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노숙인 한 명이 시민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재활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