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경보' 울리는데…"에이, 설마 불났겠어요?"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8.05.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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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100명 중 19명 "경보 울려도 대피 안했다"…전문가 "유치원 때부터 교육, 일상 속에 배어야"

지난해 11월2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교통공사 5호선 목동역에서 진행된 열차 지하철 열차화재 대응훈련에서 소방대원이 대합실 상가 화재 진화 작업 훈련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지난해 11월2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교통공사 5호선 목동역에서 진행된 열차 지하철 열차화재 대응훈련에서 소방대원이 대합실 상가 화재 진화 작업 훈련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지난달 25일 저녁 6시10분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내에서 '화재경보'가 급히 울렸다. 퇴근하려는 직장인들이 몰리는 시간이었다. 불안한 경보음에 일부는 멈칫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대다수는 신경쓰지 않고 가던 길을 가는 분위기였다. 이들을 붙잡고 이유를 물었다. 퇴근하던 광화문 소재 직장인 정성근씨(31)는 "에이, 설마 불이 정말 났겠나 싶어 그냥 신경 안 쓴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김모씨(29)도 "약속시간에 늦어 빨리 가야한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화재경보 오작동으로 인한 '해프닝'에 그쳤지만, 실제 불이 났다면 위험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화재로 위험하거나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보여주는 '안전불감증'이 문제다. 신속히 대피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거나 안일하게 대처하다 화를 키우는 것. 이에 전문가들은 안전 교육이 일상화 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유치원 때부터 경보만 울리면 피난할 수 있게끔 배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3월21일 오후 2시에는 전국적으로 화재 대피 훈련이 실시됐다. 제천·밀양 화재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실시됐지만 시민들의 참여의식은 저조했다. 당시 대형 쇼핑몰에 있다 화재 훈련을 지켜봤다던 서울시민 최모씨(49)는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크게 울렸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며 "형식적인 훈련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화재경보'가 울리는 것을 경험했다는 대학생 이모씨(25). 승강장에 서 있다가 불안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시민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라 본인도 가만히 있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화재가 실제 났든, 그렇지 않든 밖으로 대피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다들 초연한 모습이라 불안하지만 별 일 있겠거니 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5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동 2호선 신도림역에서 열린 '지하철 화재사고 시민 탈출 훈련'에서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소화기를 들고 화재를 진화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사진=뉴스1지난해 6월5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동 2호선 신도림역에서 열린 '지하철 화재사고 시민 탈출 훈련'에서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소화기를 들고 화재를 진화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사진=뉴스1
실제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은 심각했다. 머니투데이가 5월1일부터 7일까지 서울 중구·종로구·마포구·양천구 일대에서 만난 시민 100명을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응답자 중 73%(73명)가 '화재 경보가 울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답했지만, 이중 '대피했다'고 답한 이는 19%(14명)에 불과했다. 대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불이 설마 났겠나 싶어서(59%)'가 가장 많았고, '어떻게 대피할 지 몰라서(16%)'가 뒤를 이었다.



대피 훈련 부족이 '안전불감증'을 키우는 것. 또 훈련을 하더라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도 문제다. 중소기업 직장인 송모씨(36)는 "회사에서 화재 대피 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분위기에 방송만 나왔다"며 "훈련은 매년 그런 식으로 하지만 실제 화재가 나면 어떻게 할 지 대부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잦은 화재경보 오작동도 화재 위험을 둔감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서울시 화재경보기 오작동 출동 현황에 따르면 2015년 250건, 2016년 119건 등이었고, 전국적으로도 하루 평균 60~100여건씩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재 감지기 결함, 부주의한 관리 등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 지난 2월7일 대형 가구 매장인 이케아 고양점에서 화재경보기가 오작동을 일으켜 손님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며 대안으로 어렸을 때부터 안전교육을 받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제진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일본은 지진 때문에 밥먹고 소·대변을 누는 것처럼 안전교육이 일상화 돼 있다. 조금만 경보가 울려도 몸을 사린다"며 "우리나라도 유치원 때부터 안전교육을 통해 경보만 울리면 피난하도록 몸에 배게끔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소방설비의 개선도 뒷받침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 교수는 "화재가 아님에도 울리는 '비화재보'가 잦아 자동화재탐지 설비에 대한 불신이 크다"며 "값싼 중국산도 승인 받고 팔리는데, 탐지설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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