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제 소산퍼시픽 대표/사진=배병욱 기자
"이왕 가져온 거니 먹기는 하겠네만 이제 그만 찾아오게. 소용없는 일일세."
17년쯤 전의 일이다. 안익제 소산퍼시픽 대표는 속눈썹 제조업체 H사의 사장을 뻔질나게 찾아갔다. 꼭 만들고 싶은 속눈썹이 있는데, 그곳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H사는 속눈썹을 제조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자네 얘기대로 그 제품을 만들려면 우리가 제조 라인에 별도로 투자해야 하는데 자네라면 그렇게 하겠나." "아 글쎄 안 된다니까."
2004년 이렇게 세상 빛을 본 제품이 국내 연예인 대부분이 쓴다는 '아이미 속눈썹'이다. 속눈썹 제품의 경우 일반적으로 테이프 위에 한 올씩 접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아이미'는 다르다. 테이프 없이 속눈썹 가닥가닥을 손으로 일일이 '옭매기'한 제품이다. 이 때문에 속눈썹 가닥이 빠지지 않는다. 가장 큰 특징은 '무(無) 테이프' 방식이라 가볍다는 점이다.
처음 나왔을 땐 대다수 거래처가 외면했다. 원가가 기존 제품보다 4배나 비쌌던 탓이다. 하지만 청담동을 통해 연예인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소비자 시장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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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퍼시픽=피카소, 피카소=메이크업 브러시
소산퍼시픽은 메이크업 브러시 브랜드 '피카소'로 더 유명한 기업이다. 국내 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 99%가 피카소를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송이나 패션계 모든 얼굴이 피카소 브러시로 완성된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피카소는 비싸다. 원가만 해도 시중 제품보다 20배나 높다. 소비자가는 일반 제품과 비교했을 때 5배 차이 난다. 이에 대해 안 대표는 "한 명의 소비자가 피카소 제품을 많이 구매하긴 부담스러울 테고, 이건 바라지 않는다"며 "한 제품 정도만 사용해 보면서 품질에 감동받길 원한다"고 했다.
◇목적에만 눈멀지 말라
바야흐로 H&B(헬스앤뷰티)스토어·드럭스토어 전성시대다. H&B스토어에 입점한 뒤 매출이 수십 배 늘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심지어 100배나 올랐다는 곳도 있다. 너도나도 이곳에 입점 못해 안달이다.
하지만 안 대표는 랭킹 1~2위 H&B스토어 MD들이 찾아와 제품을 넣으라고 해도 이를 거절하고 있다. 현재 국내 3위(매장수·매출액 기준) H&B스토어에 입점해 있는데, 입점 당시 '경쟁사엔 물건을 안 넣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1~2위 H&B에 추가로 입점하면 해당 제품군의 매출이 5배가량은 족히 오를 거예요. 하지만 구두로 한 얘기도 약속이니까 지켜야죠. 사업 이전에 신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부득탐승(不得貪勝)
바둑의 열 가지 비결인 '위기십결' 가운데 하나다. 이기는 데만 집착하면 결국 패한다는 뜻이다. 이기려고 두는 게 바둑이지만, 목적에만 너무 매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안익제 소산퍼시픽 대표는 '부득탐승' 정신으로 20년 넘게 외길을 걸어 왔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죠. 하지만 매출에만 목매지 않습니다."
소산퍼시픽은 사반세기를 이어온 업력에 비해 외형이 그리 크진 않다. 안 대표는 "기업이란 게 수익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래 가는 게 더 의미 있는 거 아니냐"면서 "강소기업으로 남고 싶고 우리 임직원들의 2·3세들까지도 피카소에서 브러시를 만들기 바란다"고 했다.
◇이것이 알고 싶다
-품질을 좀 낮춰서라도 일반 소비자들이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하면 매출을 늘리는 데 도움 되지 않겠나.
▶품질을 좀 낮춘다? 그럴 수 없다. 그건 기존 고객들에 대한 배신이다. 또한 고객 입장에서 피카소 브러시를 손에 들고 있다는 건 '특별함'이다. 만약 너도나도 옆에서 피카소를 꺼내 든다면 '평범함'이 돼 버린다. 고객의 자부심을 지켜줘야 한다. 그리고 피카소는 양산 체제가 안 맞는 브랜드다.
-대량 생산 체제가 안 맞다는 건 무슨 얘긴가.
▶피카소 브러시는 전 세계 숨어 있는 최고의 자연모로 만들어진다. 이 원사를 얻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벼야 할 정도로 구하기 힘들다. 재료가 부족한데 어떻게 많이 만들어 내나.
-인조모를 쓸 수도 있지 않나.
▶인조모로는 원하는 품질을 낼 수 없다.
-그럼 기존 라인은 그대로 가고, 중저가형 세컨드 브랜드를 따로 만들면 되지 않나.
▶국내 내로라하는 유통 업체들이 그런 제안을 해왔지만 거절했다. 피카소는 '세컨드'란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로지 최고 품질의 브러시만 만든다.
안익제 소산퍼시픽 대표(사진 맨 왼쪽)와 직원들/사진=배병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