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인, 양세종, 박보검의 얼굴

이지혜(칼럼니스트) ize 기자 2018.04.20 09:03
글자크기
정해인, 양세종, 박보검의 얼굴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30대 중반이 넘어가기 시작한 윤진아(손예진)의 삶 속에 켜켜이 쌓인 차별과 불합리성에 대해 그린다. 윤진아는 직장에서 “윤탬버린”이라고 불릴 만큼 성추행도 감내하고, 집에서는 양다리를 걸친 남자 변호사 남자친구와 어떻게든 잘해보라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그 사이에서 윤진아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은 절친의 동생인 서준희(정해인)다. 서준희는 쉽게 사과하고, 윤진아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스토킹을 하는 예전 남자친구의 행패에 “정신차릴 새끼는 따로 있다”고 말해준다. 몰카를 찍은 예전 남자친구를 찾아가 하드웨어를 없애고도, 일부러 윤진아에게 말하지 않은 배려도 있다. 정해인이 스스로 “섬세한 남자”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남자 주인공인 정해인 이전에, 로맨스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떠오른 인물은 SBS ‘사랑의 온도’의 남자 주인공 온정선을 연기한 양세종이다. 6살 연상인 이현수(서현진)보다 자신의 감정에 있어서는 직설적으로 말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힘들어 할 때는 “이런 건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야. 현수씨는 현수씨가 잘하는 거 하면 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캐릭터. 두 캐릭터의 공통점이 있다면, 부모가 거의 부모의 역할을 하지 않고, 해외에서 오래동안 체류했다는 점이다. 남성이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정상가족’으로 분류되지 않는 배경에서 자라, 폭력이나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성애에 매달리며 여자 주인공에게서 엄마의 냄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섬세한 감성을 가진 동시에 자신의 배경에 대해 ‘상처’ 운운하며 징징거리지 않고,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을 해내며, 예의 있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줄 아는 남자들. 그리고 이들은 공교롭게 큰 키에 마른 몸, 그리고 말갛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강한 남성미보다는 여리고 얇은 선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연약해보이지는 않는 미묘함은 지금 떠오르는 남자 주인공의 새로운 상이다. tvN ‘도깨비’에서 이미 재벌가의 아들과의 연애가 아니라 재벌을 만들 수 있었던 도깨비(공유)가 등장한 것처럼, 여성 시청자들이 판타지로 소비하는 지금, 세상에 대한 탈출구로서의 남자는 초현실적인 존재를 불러들여 할만큼 요원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해인과 양세종은 또 다른 판타지로서의 남자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현실적인 존재지만, 여성이 고민하는 외모, 나이, 성공에 대한 불합리함을 인정하고 받아줄 줄 아는 남자 캐릭터는 한국 미디어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의 얼굴이 세상에 때 한 번 타지 않았을 것 같은, 단순히 ‘잘생겼다’라고 표현하기는 모자란 소년같은 표정과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나이가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말한다면,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세상과 연애에 대해 경험은 많지만 반대로 한국사회가 대변하는 많은 편견과 차별로부터 자유롭다.



박보검은 두 사람 이전에 이런 현상의 시작점이었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tvN ‘응답하라 1988’의 최택은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지만 다른 세상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해맑은 얼굴을 가졌다. 이후 이어진 tvN ‘꽃보다 청춘 아프리카’, JTBC ‘효리네 민박 2’ 등 에서도 그는 마냥 착하고,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모든 사람들이 알고있는 스타지만 아직도 민박 숙객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해인, 양세종이 드라마 캐릭터를 통해 판타지를 보여준다면, 박보검은 이를 현실로까지 확장했다. 그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설명할 수 있는 한 부분일 것이다. 여자의 손을 잡아 끌고 백화점으로 데려가는 재벌가의 아들, 운명의 상대에게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도깨비를 지나, 새로운 남성상이 여성 시청자의 눈에 들어왔다. 함께 현실을 살아가는 직장인이지만 내 말을 잘 듣고, 구남친의 몰카(유출피해 사진)를 삭제했지만 피해자를 탓하지 않는, 평등한 삶의 동반자. 그래서 참 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