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이 현실에 있다면

서지연 ize 기자 2018.04.1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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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이 현실에 있다면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손예진이 연기하는 주인공 윤진아가 열심히 일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프렌차이즈 카페 본사의 슈퍼바이저인 그는 매장 직원들의 사소한 실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지적한다. 정장 치마에 운동화를 신고 일터를 누비며 공원 벤치에 앉아 은박지에 싼 김밥을 먹는 여자. 갑자기 잡힌 미팅으로 가방에 넣어두었던 구두를 꺼내 신고 달리던 그의 앞에 20년 지기 친구의 동생 서준희(정해인)가 불쑥 나타난다.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윤진아의 얼굴과 자전거를 타고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도는 서준희의 모습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게 그려진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윤진아는 서준희 앞에서 다시 편안한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비현실적 연애와 팍팍한 현실 사이를 오가는 여성,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다.

손예진은 첫사랑의 아이콘이었다. 영화 ‘연애소설’, ‘클래식’, ‘첫사랑사수궐기대회’에서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지닌 그는 등장만으로도 액자 속의 그림 같은 인상을 주곤 했다. 그러나 손예진은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남자를 금세 유혹할 수 있는 여자를, SBS 드라마 ‘연애시대’에서는 이혼한 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을 연기하며 점차 자신의 폭을 넓혀갔다. 그가 지난 몇 년 사이 영화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 등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그렇게 연기 폭을 차분히 넓혀온 결과다. ‘비밀은 없다’에서 실종된 딸을 찾아나가는 주인공 김연홍, 나라의 운명과 함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된 덕혜옹주는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서사를 가진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가 최근 개봉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대해 “판타지 멜로 주인공은 틀에 갇혀 있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지 않길 바랐다. 약간 술에 취해 잠을 자다 깨어난 느낌으로 연기했다. 기억을 잃고 아이한테도 무뚝뚝하게 구는데, 그런 게 현실감 있게 그려졌으면 했다(‘헤럴드POP’)”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첫사랑의 이미지로 첫 번째 전성기를 열었던 배우는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넓혔고, 이제 다시 로맨스가 중심이 된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현실 속의 여성을 보여준다. 그는 윤진아에 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모님, 친구, 남자친구랑 있을 때 한 명이지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그런 지점에서 일차원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 모습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매력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진아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회식에서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다 동기들에게 ‘속없다’는 험담을 듣고, 남자친구에게는 ‘곤약 같다’는 말로 차였지만 친구의 동생에게 “누나가 더 예뻐”라는 말을 듣고 설렌다. 이 평범하면서도 복합적인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손예진의 모습은 첫사랑의 그 사람이 그 후에 어떻게 계속 살아갔는지 보여주는 것만 같다. 손예진 같은 배우가 평범한 직장인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설득해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손예진이 자리한 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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