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군산에 가면 일본이 있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8.03.2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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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동국사 전경. 종각 옆에 ‘소녀상’이 서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군산 동국사 전경. 종각 옆에 ‘소녀상’이 서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어? 한국에 이런 절이 있었어? 군산 동국사(東國寺)에 처음 찾아간 사람은 대개 이런 말 한 마디쯤은 하게 된다. 입구에는 분명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동국사’라고 적혀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느닷없이 일본 어느 사찰에 들어선 듯 생경한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동국사는 일본인이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지금의 동국사가 창건된 것은 1913년이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치다(內田佛觀)라는 이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어졌는데, 그때 이름은 ‘금강사’였다. 일본식 절이다보니 한국의 전통사찰 양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8.15 광복 뒤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김남곡 스님이 이름을 동국사로 바꾼데 이어,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인데,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았다는 게 놀랍다.



대웅전은 ‘大雄殿’이라는 현판을 제외하고는 건물 양식이 완전히 일본식이다. 지붕 물매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건물 외벽에 미서기문(두 줄 홈에 두 짝 또는 네 짝을 달아서 좌우 문짝 곁에 밀어 붙여서 여닫게 한 문)이 설치돼 있는 등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지붕은 팔작지붕 홑처마 형태로 높이 솟아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이 많고 단청이나 풍경은 없다. 대웅전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는 복도로 연결돼 있다. 법당 내부는 한국 불교 양식에 맞게 조금 변형돼 있는데 보물 제 1718호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을 모셨다.

동국사는 일본식 건축양식 외에 별다른 특징이 있는 절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큰 의미를 지닌 것들이 여럿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참사문’을 새긴 비(碑)다. 참사문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글이다. 이 참사문은 동국사를 창건했던 일본 조동종 종단이 1992년 공식 발표한 글로,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다.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이 참사문을 보면 착잡한 마음부터 든다.



일본 불교종단 조동종 종단이 1992년 발표한 ‘참사문’을 새긴 비/사진=이호준 여행작가일본 불교종단 조동종 종단이 1992년 발표한 ‘참사문’을 새긴 비/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왜 일본 정부는 스스로가 저지른 침탈과 폭력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할 줄 모를까. 자신들은 여러 번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강변하지만, 방어막을 쳐놓고 두루뭉술하게 때운 것들뿐이다. 진정한 사과는 상대방이 납득하고 용서할 마음이 들 때 완성되는 것이다.

군산은 동국사 외에도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주는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대표적인 일제의 수탈기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산 주변지역의 농토 가격은 일본의 1/10에 불과했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몰려왔고 쌀을 기반으로 하는 정미업과 양조업이 중심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하기 위해 항만시설을 만들었고, 이곳을 통해 1934년 한해만해도 무려 870만 석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그해 전국의 쌀 생산량은 1,630만 석에 불과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도 어두운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물 중 하나다.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이 가옥은 미곡유통을 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주택이다. 흔히 ‘히로쓰 가옥’이라고 부른다. 일본식 2층 목조 주택으로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이 두 채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놓은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있다. 이곳에서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을 찍었다.


해망굴 역시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길이 131m, 높이 4.5m의 반원형 터널로 구 시청 앞 도로를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해망동과 연결하기 위해 뚫었다. 이곳에는 내항에서 나오는 수산물을 파는 좌판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조선은행 군산지점’ ‘조선식량영단 조선출장소’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군산세관 본관’ 등이 있다. 부두에 있는 ‘부잔교’ 역시 일제 수탈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근대역사의 상징물들은 대부분 ‘근대역사탐방로’ 범위 안에 있다. 하루쯤 날을 잡아 지도 한 장 들고 찾아다니기에 알맞다. 역사는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다. 아픈 역사 역시 이 땅에 드리워졌던 그림자이기 때문에 외면할 수는 없다. 과거라는 거울에 현재를 비쳐보면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라도 그 현장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군산에 남아 있는 근대 유산들이 값진 까닭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군산에 가면 일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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