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배려석' 비워놨더니… 임산부 앉아 졸았다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8.02.06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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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면 부끄럽다"는 인식 확산, 벽·바닥·좌석 '핑크색 디자인' 큰 몫

지난 4일 저녁 서울 지하철 5호선 전동차 내에 있는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에 한 임산부가 앉아서 쉬고 있다. 가방에 핑크색 임산부 배지가 달려 있다./사진=남형도 기자지난 4일 저녁 서울 지하철 5호선 전동차 내에 있는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에 한 임산부가 앉아서 쉬고 있다. 가방에 핑크색 임산부 배지가 달려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지난 4일 저녁 6시쯤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서울 지하철 5호선 전동차 안. 광화문역에서 탑승하니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이 비워져 있었다. 50대 여성은 자리를 놔둔 채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잠시 뒤 공덕역에서 또 다른 청년이 탑승했지만 자리가 없음에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지 않았다. 또 다른 20대 여성도 마찬가지로 스쳐 지나갔다.

여러명이 비워둔 임산부 배려석은 약 15분 뒤 채워졌다. 신길역에서 한 여성이 탑승해 앉은 것. 가방에 핑크색 임산부 배지를 단 '임산부'였다. 착석한 임산부는 지친 몸을 뒤로 기대더니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며 쉬었다.



그동안 양보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양쪽에 있는 '명당 자리'라 임산부가 아닌 다른 이들이 독차지해왔지만 점차 배려하는 차원에서 비워두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 특히 2015년 7월 핑크색 디자인으로 주목도를 높인 뒤부터 이 같은 인식이 높아졌다. 이에 임산부들의 만족도도 높아지는 분위기다.

지난 1~5일 머니투데이가 서울 지하철 내 임산부 배려석 40곳을 살펴본 결과 27곳(67.5%)은 비워져 있거나 임산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 나머지 13곳(32.5%)은 임산부가 아닌 노인·아저씨·아주머니·학생 등이 앉아 있었다. 주로 오전 7~8시 출근시간이나 저녁 6~7시 사이 퇴근시간에 임산부가 아닌 이들이 배려석을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4일 저녁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둔 시민들./사진=남형도 기자4일 저녁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둔 시민들./사진=남형도 기자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둔 시민들은 서 있거나 다른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양보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지하철 2호선에서 만난 직장인 박현준씨(34)는 "임산부가 언제든 와서 앉을 수 있게 비워둬야 한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퇴근길이라 피곤한데도 앉지 않고 비워뒀다"며 미소 지었다.



주부 이정아씨(45)도 "둘째 아이 임신했을 때 대중교통을 타면 양보를 못 받아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인식에는 핑크색 디자인으로 임산부 배려석을 꾸민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서울시는 2015년 7월말부터 지하철 승객들이 임산부 배려석을 한 눈에 알아보고 양보할 수 있도록 좌석과 등받이, 바닥까지 '분홍색'으로 연출했다. 엠블럼도 분홍색 바탕에 누구나 임산부임을 쉽게 알아보도록 허리를 짚고 있는 여성을 형상화하고, 바닥에는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는 문구도 넣었다.
4일 저녁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둔 시민들./사진=남형도 기자4일 저녁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둔 시민들./사진=남형도 기자
대학생 윤성호씨(25)는 "핑크색 디자인으로 바꾼 뒤부터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것이 부끄러워졌다"며 "양보 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한예지씨(22)도 "거기 앉으면 임산부라고 광고하는 것 같아서 못 앉겠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는 아직도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는 데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직장인 최모씨(51)는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지, 왜 늘 비워둬야 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며 "임산부만 피곤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럼에도 임산부들은 점차 배려가 확산되는 데 대해 대체로 만족해 하는 분위기였다. 임신 4주차인 장모씨(33)는 "초기라 배가 부른 티도 안 나는데 임산부 배려석이 비워져 있으면 편하게 앉아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실제 임신 2개월 이내 '초기 임산부'는 유산 가능성이 높아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신 9개월차인 이은정씨(34)도 "아직도 충분하진 않지만, 확실히 임신 초기보다는 배려석에 대한 양보가 늘었다"며 "임산부라 몸이 무겁고 힘든데 이런 인식이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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