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 먼 곳일 필요도 없다. 지난 한 해는 제대로 걸어왔는지, 새로 받아든 한 해는 어떻게 써야 할지,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면 좋다. 충남 부여에 있는 만수산 무량사는 마음에 고요를 들이고 싶을 때 찾아가는 절이다. 특히 혼자 걷고 사색하기에 알맞은 절집이다.
천왕문 앞에서 바라본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사진=이호준 여행작가
문을 열어놓은 영정각에는 한 사람의 초상이 걸려있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의 중년 남자. 매월당 김시습이다. 이 절에서는 설잠(雪岑) 스님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쳤지만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걸 버리고 떠돈 남자. 그리하여 후대에 생육신이라 불린 남자. 시대와 불화하여 숱한 기행을 남겼지만, 누가 뭐래도 당대의 문장가이자 시인이고 학자였다.
영정각의 매월당 김시습 초상/사진=이호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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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절에서 생애를 마쳤다. 왜 말년에 이 궁벽한 절까지 왔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죽음을 예감하고 파도처럼 거칠었던 생애를 재우러 왔을까? 갈등과 번뇌의 불을 끄고 관조와 깨달음의 등을 걸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을까. 그의 초상으로 오후의 창백한 햇살이 비껴 내린다. 빛을 머금은 눈에서, 반역의 시간을 온몸으로 감내했던 한 사내의 고통을 엿본다. 무겁다고 투덜거리며 지고 온 내 고통이 얼마나 사사로운지 깨닫는다. 타인의 삶의 무게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가벼이 하는 건 비겁한 짓이 아니다.
매월당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극락전 뒤뜰을 걷는다. 지금은 한겨울의 쓸쓸함만 맴돌지만 가을에는 세상 어느 곳보다 단풍이 고운 절이다. 이리 저리 걸어도 사람의 흔적은 없고 산신각 뒤의 조릿대만 바람결에 서걱거린다. 뒤뜰을 한 바퀴 돈 뒤 다시 극락전 앞 너른 마당으로 나와 느티나무 아래 돌의자에 앉는다. 요사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고 뎅그렁뎅그렁 운다. 그 소리에 저자에서 지고 온 상처와 갈등을 슬그머니 묻어버린다. 빈자리에 한해를 살아갈 기운을 받아들인다.
춥지 않은 날이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무량사에서는 저녁 무렵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좋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듣는 종소리가 유달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종소리가 한 번씩 울릴 때마다 내 안에서 버글거리는 번뇌가 조금씩 지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