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때 허리 감싼 부장님…그냥 넘겼다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7.11.11 06:25
글자크기

침묵하는 '직장 내 성범죄' 더 많아…"생계와 직결, 문제 제기 힘든 권력관계"

/삽화=임종철 디자이너/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A씨(32·여)는 2년 전 직장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회식 자리에서 술 취한 상사가 A씨 허벅지에 손을 올린 것. 순간 너무 놀란 A씨가 다리를 움직여 피하자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듯 다른 직원에게 말을 걸며 태연하게 행동했다. A씨는 "너무 기분이 나빠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눈물 난다"면서도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고 말했다.

온라인상 고발 등으로 '직장 내 성범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직원들은 침묵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굳이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거나 직장 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서다. 해결되지 않고 피해만 커질 것 같아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들은 생계와 직결된 직장 특성상 문제 제기가 어렵다며 결국 조직 문화 개선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머니투데이가 9일부터 10일까지 대기업·중소기업·공기업 등에 다니는 여성 직장인 30명을 취재한 결과 직장 내에서 직·간접적으로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겪었다는 이들은 11명(37%)이었다. 하지만 이중 회사에 알리거나 경찰에 신고했다는 직장인은 단 1명에 불과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나 블라인드와 같은 익명 앱 등을 통해 직장 내 성범죄에 대한 고발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삽화=이지혜 디자이너/삽화=이지혜 디자이너
성추행 등을 당해도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 대다수는 "직장 내에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넘어갔다"고 답했다.



대기업 직장인 B씨(28)는 "노래방에서 직장 상사가 분위기에 취해 허리를 감싸고 어깨동무를 했는데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넘어갔다"며 "괜히 유난스럽게 보일까봐 걱정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직장인 C씨(33)는 "신입사원 시절 상사로부터 '가슴이 커서 남자친구가 좋아하겠다'는 식의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는데, 찍힐까봐 대꾸도 못하고 그냥 참았다"고 고백했다.

대처 방법을 잘 몰라 침묵했다는 직장인도 있다. 공기업 직장인 D씨(27)는 "회식 자리나 상사와 둘이 있을 때 성희롱이나 은근슬쩍 성추행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정색하기도 힘들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잘 몰라서 그냥 넘겼다"고 말했다.

회사에 말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기업 직장인 E씨(35)는 "성희롱을 당한 동료가 있었는데 상사에게 보고했더니 '그 정도는 좀 넘어가면 어떠냐'고 무마하고 말더라"라며 "그 다음부터는 회사에 얘기해도 해결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가 '권력 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는 "회사 내 고충처리부서나 국가인권위원회 제소, 형사고소 등 대응 방법은 이미 있다"면서도 "하지만 직장이 피해자의 생계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직장 내 권력을 쥔 상사 등이 성희롱을 했을 때 문제 제기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애초에 피해자들이 쉽게 대응하기 힘든 이유는 성희롱이 만연한데다 '남자들이 원래 그러니까 참아라'는 식으로 교육 받아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며 "결국 해결되기 위해서는 직장 내 성평등 문화가 만들어져야 피해자들도 대응을 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