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희의 思見]우리가 알지 못하는 삼성-두번째 이야기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장 2017.10.2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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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운명의 범람을 통제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갖은 고난을 겪던 이탈리아의 얄궂은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조언을 담은 ‘군주론’에서 포르투나(운명)의 여신은 험난한 강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는 자신의 군주론 전체에 걸쳐 이 포르투나(운명: fortuna)와 비르투(역량: virtu)의 방향성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젊은 시절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 고초를 겪다가, 철이 들어선 생계와 사업보국의 소명을 안고 밤낮을 잊고 기업활동을 하다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영어(囹圄)의 몸이 된 삼성의 최고위 임원들에게 포르투나와 비르투는 무엇일까.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던’ 그 시절 10대 후반의 삼척과 밀양 ‘촌놈’은 상경해 ‘서울대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학생 운동에 투신하다가 강제징집돼 군대에 끌려가거나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다. 최지성 전 삼성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실차장(사장)의 얘기다.



최 전 부회장의 친구인 이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과거 한 기고에서 “학생운동의 이론에 밝은 사람은 최지성이었고, 투사는 배기운, 양관수는 연설을 잘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이 의원은 “나는 단과대학 수준이었고, 최지성 등은 몇 개 학교에 걸친 큰 서클의 지부 회장이었는데 그 당시 위수령에 이어 휴업령이 내려지면서 최지성 등은 처벌받고 징집영장을 받아 입대했다”고 전했다.

최 전 부회장은 학생운동을 계속 해주길 바라는 동료 선후배들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며 가난한 공무원 집안 4남매 중 장남이라 생계를 위해 삼성에 입사해, 봉천동의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시아의 싸구려 전자업체 직원이라는 박대를 받으며, 후진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겠느냐는 선진국 경쟁사의 비아냥 속에 유럽 1인 지사장으로 반도체를 팔려 다녔고, 결국 세계 1등에 올려놓는데 일조했다. TV도 휴대폰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힘없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서러움에 미국 경쟁 당국의 담합조사로 반도체 마케팅 임원들이 구속돼 미국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할 때 그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사업보국만이 살 길이라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렇게 애플 등의 공격도 막아냈고, 내고 있던 중이었다.

장 전 사장도 비슷한 시기 서울대 내 국제경제연구회(일명 국경회)라는 운동권 서클을 결성해 1대 회장을 맡으며, 반독재 투쟁을 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급진적이었던 국경회는 이후 서울대 내 5대 운동권 서클로 성장했고, 장 전 사장의 뒤를 이어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2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장 전 사장이 이끌었던 국경회는 ‘노동자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 사회는 중간층이 두텁고 영향력도 커 이들을 통해 사회의 변혁을 이뤄야 한다’는 사상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학생 운동 후 취직한 삼성물산 재직시절 학용품과 청소도구 등 잡화담당이었던 '장대리'는 '가난'을 이겨야 한다는 희망 하나로, 국내 종합상사 중 잡화부문 판매 1등을 하면 막걸리 한잔에 기뻐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장 전 사장이 삼성 내에서 기획업무를 담당하면서 사회공헌활동 중 유난히 드림클래스(저소득층 방과 후 수업) 등 희망사다리를 놓는데 신경을 썼던 것도 이런 데서 유래됐다. 그는 기자를 볼 때마다 특히 우리 사회의 양극화 심화에 많은 걱정을 했었다.

학창시절 꿈꿨던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의 이상을 직장생활을 통해 이루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인물이 최 전 부회장과 장 전 사장이다. 1년에 한번 신정에만 쉬고 일할 정도였고, 에어컨이 있는 회사가 더 시원하고 좋다며 휴가도 가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의 시대에는 그게 포르투나(운명)였다.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곧 운동이자 혁명’이었던 시절을 기업인이라는 다른 투사의 이름으로 살았고, 세계 1등을 일궈냈던 그들이다.

최 전 부회장은 수출 종합상사 얘기를 주제로 다룬 드라마 ‘미생’을 보고 “우리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보다는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전세계 어디든지 쫓아다니며 아이들이 커가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 물건만 팔려 다녔다”고 하기도 했다.

20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고, 30~60대까지는 사업보국을 위해 달려온 그들은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끝자락에 남은 여유를 찾지 못하고 영어의 몸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 반대투쟁의 대상이었던 인물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원하지 않았던 불편한 관계로 학생운동 시절에도 겪지 않았던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 갑자기 그들에게 닥쳐온 포르투나를 그들의 비르투가 통제하고 벗어날 수 있을까.
오동희 부국장 겸 산업1부장오동희 부국장 겸 산업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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