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시 ‘팝콘’은 서시(序詩)라 할 만큼 이번 시집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준다. 폭립종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가는 과정을 꽃에 비유한 이 시는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자아를 뛰어난 솜씨로 다루고 있다. 애초에 화자는 “단단하고 냉정한 성격을 가졌”지만 팝콘을 만드는 기계, 어쩌면 결혼과 같은 새로운 환경에 처하는 순간 “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 내가 스스로 변하는 능동이 아니라 기계에 의해 인위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수동인지라 불안은 더욱 가중된다. 초조하고 불안한 화자가, 아니 불안에 의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그림자’를 만드는 것. 그림자는 내 분신이지만 나에게 직접 데미지를 주지 않는 존재이므로 화자는 “몸 뒤척이며 반전 준비”를 한다.
나는 부채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암실 안에서
납작하게 웃으며 기다린다
이봐, 부채
이 웃음이 사라지기 전에
이젠 나 좀 꺼내주지?
- ‘부채 또는 부채’ 부분
다 잊어버릴 거예요
다른 사람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난 뾰로통해지고
돌아본 내 몸은 침대 속에서 암전
잠든 몸을 보고 나는 조금 편해져서 잠든 내가 깰까 봐 조용히
입술을 내밀고 당신과 이별하는 중이다
- ‘남아도는 머리’ 부분
상자를 닫는다
나를 안에 남겨두고
상자 속에서 나는 다시 상자를 만든다
쌓여가는 상자
벽이 흔들린다
- ‘나의 다른 상자들’ 부분
“하얗게 부서질 때까지” 관능을 자랑하던 입술은 “빨강 위에 빨강을 덧바르”다가 결국 “당신과 이별”을 선택하는 상징물이 된다. “퉁퉁 부은 입술 앞에서/ 주먹은 어디까지 주먹일 수 있나”(‘만두’), 즉 일방적인 폭력 앞에 “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떠”(‘서로를 떠도는 중이다’)돌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암전 안에서/ 납작하게” 있거나 “침대 속에서 암전” 상태로 견디고 있는 우울하고도 불안한 화자가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데는 한 곳밖에 없다, “누가 저 산 너머에서 스카프를 흔들”(‘무지개’)며 부른다. 어머니! “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노루귀가 피는 곳’).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하는 침(당신)이 아니라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어주는 “어머니의 손”. 신기하게도 신통하게도 세상이 환해진다.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어머니의, 그리움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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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어느 세상의 기혈이 뚫렸나 하루도 환하다
- ‘노루귀가 피는 곳’ 전문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최인숙 지음. 시산맥 펴냄. 120쪽/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