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과학책에서 보는 것과 다른 재미가 필수"

머니투데이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2017.09.26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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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심사평

"SF는 과학책에서 보는 것과 다른 재미가 필수"


행복은 삶의 유일한 덕목이요 재미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장 큰 힘이다. 연애도 재밌을 때 행복하고 일도 흥미로워야 즐겁다. 생존과 번식처럼 생명의 기본 요소에서 재미가 중요한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데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글의 최고 덕목도 재미다. 학교 공부가 하기 싫은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재미가 없어서다.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 이후로는 절대로 재미없는 책은 읽지 않는다.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은 재미없는 글도 읽어야 할 때가 있으니 바로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 공모전 심사다. 올해 예심도 졸음과의 지난한 싸움이었다. SF는 기본적으로 재밌는 소재를 다룬다.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전개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도리가 없는 경우가 작년에 많았다. 그래서 올해에는 간단한 시놉시스를 첨부하게 했지만 심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모에 제출한 작품 수도 늘었고 작품 수준의 스펙트럼도 더 넓어졌다. 덕분에 꼼꼼하게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작품을 우선 골라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히려 작년보다 짧았다. 단지 장편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 문제.

예심에서 내가 고른 중단편은 '그는 돌아온다' 'Birthday' '외계인의 최후'였으며 장편은 '이빅션'(Eviction)이었다. 아쉽게도 네 작품 모두 본선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그는 돌아온다'는 타임머신 개발자가 암으로 잃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시간을 이동하다 보니 의외의 일들이 생기면서 현재, 과거, 미래의 주인공이 동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아내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흥미롭게 다룬 작품이다.

'Birthday'는 완벽한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이 스스로 진화하여 인간의 통제권을 넘어설 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다룬 SF 스릴러다. 작가는 그 로봇은 더 이상 로봇도 인간도 아닌 새로운 종이라고 말한다. 뇌를 제외한 나머지 육체는 인간의 줄기세포로 만든 로봇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게 중요한 요소인데, 이미 현실 세계에서 거짓말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한 지 6년도 넘었다.

내가 읽은 중단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작품은 '외계인의 최후'였다. 자기 행성을 탈출한 괴물처럼 생긴 외계인들이 불모지나 다름없는 극지방에서 살게 해주기를 청한다. 이때 예상되는 것은 배신과 응징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깔끔하다.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또 있다. 대부분의 응모 작품들은 지나치게 많은 설명을 하는 데 비해서 '외계인의 최후'는 대화 중에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SF를 읽는 게 과학책을 읽는 행위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장편 심사는 솔직히 고역이었다. 왜 장편으로 써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심사한 작품 가운데 '이빅션'은 달랐다. 2029년 외계 생명체가 지구인에게 3년의 시간을 주면서 지구를 떠나라고 협박한다. 지구인들은 대탈출 노아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기회가 있다. 여기까지는 기시감이 있다. 그런데 티켓을 두고서 일어나는 온갖 협잡과 음모 그리고 더러운 거래가 이 세상의 거울처럼 펼쳐진다. 이번에 장편 당선작으로 선정된 작품이 없었다면 강력한 수상작 후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본심에서 장편 선정은 너무나 쉬었다. '에셔의 손'이 너무나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중단편 당선작 선정에는 긴 토론이 필요했지만 당선자를 합의하는 데 격론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응모작의 수준의 스펙트럼은 작년보다 넓었지만 당선작의 수준은 한결 더 높아진 느낌이다.

알파고를 경험한 2016년에는 유난히도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올해에는 주제와는 상관없이 4차 산업혁명 또는 5차 산업혁명 시대를 거론한 작품이 많았다. 나중에 과학문학공모전에 제출된 작품에서 키워드를 분석해 그 시대의 키워드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밝히는 통계물리학적인 논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SF 작가도 아니고 열렬한 SF 팬도 아니다. 단지 재미로 문학을 읽는 평범한 소비자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부탁하자면 등장인물들에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 우리말 이름이 제일 편하다. 안 되면 평범한 외국어는 어떨까. 50년 이상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 작품을 읽을 때는 메모를 해야만 한다. 그러면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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