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서해안드라이브의 백미, '백수'를 달리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7.09.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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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백수해안도로를 달리다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드라이브를 즐기던 사람들이 전망대에서 낙조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드라이브를 즐기던 사람들이 전망대에서 낙조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언제부턴가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어지간한 조건만 되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꼭 자동차가 필요할 경우가 있다. 오지에 간다든가, 대중교통이 드문 곳을 돌아다녀야 한다든가, 드라이브 코스를 찾아가는 여행일 때가 그렇다. 드라이브 코스는 해안도로를 좋아한다. 어느 곳보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의 경우는 검푸른 바다를 끼고 직선으로 달리는 맛이 있고, 서해안은 굽이굽이 달리다 곳곳에 차를 세우고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남다르다.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아기자기한 서해안을 선호하는 편이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백암리 석구미 마을까지 16.8km에 달하는 길은 서해안 드라이브 코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백수해안도로’다. 어지간만 하면 지자체마다 무슨 무슨 8경이니, 10경이니, 심지어 13경이니 정해놓지만 나는 그런 이름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막상 찾아가 보면 별 볼거리도 없는데 억지로 끼워 넣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광 8경 중 1경인 백수해안도로는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해당화꽃 삼십리 길’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는 이 도로는 국토해양부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실질적인 드라이브 코스는 법성포를 빠져나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를 지나는 곳부터 시작된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영광대교도 볼거리다. 그곳을 지나고 나면 오른쪽으로 바다를 두고 달리게 된다. 완만하게 휘어 돌아가는 도로와 높지도 낮지도 않은 해안절벽을 따라 가는 맛이 남다르다.

며칠 전에 이 길을 다녀왔다. 영광 불갑사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이 길을 제대로 즐기려면 저녁 무렵에 가는 것이 좋다. 길도 길이지만 낙조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면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가 펼쳐진다. 도로는 2차선이지만 곳곳에 작은 주차장과 전망대를 마련해놓아서 편안하게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바다의 정취에 푹 빠져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나르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나르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그런데 그날따라 내 눈길을 끌어당긴 것은 조금 멀리 물러나 있는 바다도, 그 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배도, 넓게 펼쳐진 갯벌도, 서쪽 하늘로 기울어가는 태양도 아니었다. 갯벌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서 있는 곳과 그들이 일하는 곳이 너무 멀어서 사람 하나하나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풍경은 더욱 아련하고 인상 깊게 가슴으로 들어왔다. 어느 땐 나무 하나하나보다 조금 떨어져서 보는 숲이 훨씬 아름다운 법이다.

그들은 물이 빠진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있었다. 밀물이 들어오기 전에 얼른 작업을 마치려고 그러는지, 멀리 있어도 분주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낙네들은 조개를 캐고 남정네들은 캔 조개를 담아 뭍으로 끌고 나오는 장면은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땀 흘리는 노동에 아름답다는 말을 붙이기에는 조금 미안했지만 ‘경건한 아름다움’이란 문구를 대체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일하며 소통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아니면 노동요라도 부르는지 높고 낮은 목소리가 갯벌을 건너왔다. 물론 멀리 있으니 그저 아득한 소리일 뿐이었다. 드물게 아이들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아이들까지 왜 데리고 나갔담? 하지만 금세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쁜 시간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테니까.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려고 따라 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갯벌이 더욱 활기차 보였다.


그 광경에 푹 빠져있는 사이 해가 빠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바닷물이 서서히 갯벌 쪽으로 진군해 왔다. 조개를 캐던 사람들도 퇴각하는 병사들처럼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조차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저들이 검은 개흙을 뒤져 캐내는 것은 조개뿐 아니라 내일을 살아갈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희망은 그들에게서 멈추지 않고 내게도 전해져왔다. 갯벌에 밀물이 들듯 가슴에 행복이 고이기 시작했다. 여행이 전해주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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