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때 묻지 않은 섬, 외연도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7.07.0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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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상록수가 우거진 당산/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상록수가 우거진 당산/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여름 여행을 하기 가장 좋은 때가 이 즈음이다. 산천은 짙푸르게 깊어졌고 더위의 절정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방학이 시작되고 해수욕장이 모두 열리면 도로는 주차장이 되고 바다는 콩나물시루가 될 것이다. 그 전에 움직이는 게 좋다. 요즘 가기 좋은 국내 여행지를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섬을 추천하고는 한다. 그중에서도 충남 보령의 외연도는 내 안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섬이다. 그곳에 다녀온 지도 벌써 두해가 지났다.

외연도는 충남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섬이다.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53㎞ 떨어져 있으며 여객선을 타고 2시간 15분 정도 걸린다. 외연도로 가는 뱃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배를 따라오던 크고 작은 섬들이 모두 돌아가고 망망대해에서 시선이 방향을 잃을 무렵 작은 점 같은 섬 하나가 나타났다. 해저 깊이 숨어 있다 불쑥 솟아오른 듯, 느닷없는 만남이었다.



연무에 싸인 섬, 외연도(外煙島)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섬은 바다안개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신비의 섬, 때 묻지 않은 섬, 열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섬 등으로 불리는 외연도. 선착장 한쪽에서는 노인들이 빈 시선으로 시간을 되새김질 하고 어부들은 그물을 꿰매고 있었다. 섬 트레킹은 상록수림이 있는 당산을 거쳐 해안을 끼고 도는 ‘탐방로 코스’를 택했다. 당산 숲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후박나무·동백나무 같은 상록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은 말 그대로 원시림이었다. 숲의 모든 생명이 향기를 내어 객을 맞았다. 키 큰 나무들은 새들을 품에 안고 삶을 예찬하고 있었다.

해안 트레킹 코스의 시작점으로 삼은 곳은 고라금. 마을 끝에 있는 공원을 지나 발전소에서 고개를 넘으면 닿는다. 언덕을 거의 내려갈 무렵 대숲 사이로 파란 바다가 활짝 펼쳐졌다. 산속에서 느닷없이 개활지를 만난 듯 시야가 환했다. 옥빛? 코발트? 갯벌이 없는 곳이라 물이 수정처럼 맑았다. 해변에는 크고 작은 몽돌들이 수없이 깔려있었다. 파도가 다녀가며 남겨 놓은 지문들이다.



해변을 타고 한 바퀴 도는 트레킹 코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해변을 타고 한 바퀴 도는 트레킹 코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고라금 다음 목적지는 누적금. 해변에 우뚝 서 있는 바위가 마치 볏단을 쌓아 놓은 모습, 즉 노적가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개가 걷힌 세상은 잘 닦아 놓은 사기그릇처럼 반짝거렸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걸었다. 휙휙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다. 누적금을 지나 언덕 하나를 넘으니 다시 바다가 열렸다. 돌삭금이다. 저만치 보이는 봉화산은 구름을 모자 삼아 쓰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로 고래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쳐 지나갔다. 고래를 닮았다는 고래섬이다.

돌삭금을 거쳐 작은명금‧큰명금으로 가는 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 풍경 앞에서는 누구나 말을 잃게 마련이다. 이런저런 수식어가 필요한 풍경은 극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기 어렵다. 언덕에 양탄자처럼 펼쳐진 초지와 시원한 바다, 그리고 구름을 두른 봉화산. 유년기에 잃어버린 꿈속으로 데려다주기라도 할 것처럼 푸른색 일색이었다.


큰명금을 벗어나 약수터로 올라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벤치에 앉았다. 오장육부에 담아온 속세의 티끌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거기서 내처 올라가면 봉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노랑배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트레킹의 종착점이 그곳이다. 기어이 정상까지 올라가겠다고 욕심낼 일은 아니다. 걷는 것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니 석양을 고스란히 안은 바다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오른쪽으로는 대청도와 중청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왼쪽 당산 너머로 팔색조가 산다는 횡견도가 길게 누워 있었다. 이곳이 섬에서 정해 놓은 탐방로의 종점이다. 험해지는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마당배가 나오고 섬을 대부분 일주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욕심대로 할 일은 아니다.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중간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나? 아니, 잘한 일이다. 시간에 걸음을 담보 잡히지 않았으니 얼마나 행복했던가.

해가 지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저녁 빛을 받은 장엄한 풍경이 곁을 따랐다. 조금씩 나 자신을 지워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단 1초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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