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시절 정현호 대표/사진제공=메디톡스
휴대폰 저편 남자는 김정남이 보툴리눔 톡신에 의해 피살됐을 가능성이 있냐고 물었다. 정 대표는 흐릿한 CCTV 영상 속 김정남이 여성들의 공격을 받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걸 보고는 "보툴리눔 톡신 가능성은 없다"고 곧바로 대답했다. 치사량 이상 보툴리눔 톡신에 노출돼도 즉사하지 않을 뿐더러 한동안 활동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정 대표의 어렸을 적 꿈은 과학자였다.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를 여행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카이스트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까지, 그의 인생에 기업인은 눈곱만큼의 공간도 없었다. 오히려 사업에 부침이 심했던 경찰 공무원 출신 아버지를 보며 사업은 할 게 못 된다고까지 생각했다.
정현호 소년은 광주에서 여수로, 여수에서 다시 광주로, 아버지 사업이 흥하거나 기울 때마다 터전을 이리저리 옮겨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마땅히 정 붙일 곳 없던 그에게 공부와 미래 과학자 꿈꾸기는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학에 진학할 때 그의 꿈은 수정됐다. 궁극적이면서 근본적인 그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어졌다. 그가 선택한 것은 미생물학이었다.
2012년 5월 오송 제2공장 기공식/사진제공=메디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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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호 대표의 은사이자 훗날 식품의약품안전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을 지낸 양규환 교수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가져온 보툴리눔 톡신 균주가 눈에 들어왔다.
"양 교수님이 가져온 균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맹독인데 치료제로 쓰인다는 걸 알고 대부분의 미생물학도가 선택하는 독성학 대신 독소학을 논문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보툴리눔 톡신 제품 원조인 미국 엘러간 '보톡스'는 사시교정용 치료제 정도에 불과했다. 간간이 주름개선 효과가 학계에서 소개됐지만 미국에서조차 미용시술용으로 승인을 얻지 못했다.
정 대표가 연구가치를 높게 본 건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잠재된 사업가 DNA가 꿈틀 댄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국내 1호 보툴리눔 톡신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객원연구원을 마친 정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교수를 거쳐 2000년 메디톡스를 창업했다.
메디톡스의 보툴리눔 톡신 제품 '메디톡신'/사진제공=메디톡스
◇본토에서 알아본 '혁신형' 보툴리눔 = 결과적으로 제약사들의 무지는 정 대표와 메디톡스에 '약'이 됐다. 스스로 시장 개척에 나선 정 대표는 성형외과 환자들 사이의 입소문에 힘입어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국내에서 연간 100억원대 매출을 올리던 엘러간은 뛰어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을 앞세운 메디톡스에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메디톡스는 2009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고 2013년에는 엘러간에 액상 보툴리눔 톡신 '이노톡신' 기술을 3억6200만달러(약 4100억원)에 수출했다.
2014년에는 보툴리눔 톡신에 포함된 비 독소 및 동물성 성분을 완전히 제거해 보톡스 내성을 줄인 신제품 '코어톡스'를 개발했다. 피부미용 시장에서는 보툴리눔 톡신과 함께 '물광 주사'에 쓰이는 히알루론산 필러(뉴라미스)도 내놓았다.
메디톡스 오창공장/사진제공=메디톡스
정현호 대표의 꿈은 보툴리눔 톡신을 당뇨나 뇌질환 등 특정 질병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면역치료제로 개발하는 것이다. 보툴리눔 톡신이 우울증 원인 신경 활동을 둔화시켜 우울증 치료제로까지 쓰일 수 있다는 이론적 토대까지 마련된 상황이다.
메디톡스의 미래는 보툴리눔 톡신과 필러, 기능성 프로바이오틱스 등 3대 주력 제품군으로 무장한 바이오 강자다. 5년 내 매출 1조원을 달성하고 글로벌 톱 20 바이오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