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보험과 규제 그리고 관성의 법칙

머니투데이 전혜영 기자 2017.06.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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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험회사들이 규제 때문에 힘들었다면 앞으로는 경쟁 때문에 힘들어질 것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2015년 10월 보험업권의 규제 빗장을 푸는 '보험산업 경쟁력 강화 로드맵'(이하 로드맵)을 발표한 후 보험사 CEO(최고경영자)들과 만나 했던 말이다.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 의지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제대로 경쟁하지 않고 기존의 '붕어빵'식 영업을 탈피하지 못하는 보험사는 도태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임 위원장은 "로드맵은 기존의 양적 성장을 질적 성장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보험산업의 미래가 없다는 절박한 인식 하에 마련했다"는 말로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 의지에 대한 업계의 반신반의에 쐐기를 박았다.

이후 지난 1년8개월여간 보험업계에는 기존에 없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붕어빵처럼 비슷한 상품을 만들어 비슷한 가격에 팔면서 판매채널 확보, 소위 유통 경쟁에 골몰하던 보험사들이 본격적인 가격 경쟁에 돌입했고 '신상품 베끼기' 행태 금지로 그간 가뭄에 콩 나듯 보이던 배타적사용권(독점적판매권) 획득 열기도 뜨거웠다.



금융당국은 당초 보험상품의 가격통제 장치도 단계적으로 폐지해 시장 자율에 맡길 계획이었다. 보험상품을 직접 만드는 보험사가 상품 설계는 물론 가격까지 자율적으로 결정해 진정한 의미의 상품 경쟁을 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며 내년 말 폐지 예정이던 실손보험료 조정폭 규제를 2015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겠다고 밝히면서 보험업계에 불어닥쳤던 '자율화' 바람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보험사들은 로드맵 시행 이후에 받은 보험료 대비 지급한 보험금의 비율인 손해율이 높은 실손의료보험(이하 실손보험) 등 일부 상품의 보험료를 인상해왔다. 보험료를 올렸지만 실손보험의 손해율은 120% 이상으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 손해율이 120%라는 것은 보험료로 100원을 받아 보험금 등에 120원을 지출해 20원을 손해봤다는 의미다.



하지만 정부는 실손보험료 인상이 과도하다며 없던 법까지 새로 만들어 보험료 인하를 유도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이번에 '칼'을 댄 건 실손보험이지만 앞으로 다른 보험상품이라고 도마에 오르지 말란 법이 없다. 보험업계에서 로드맵이 사실상 끝났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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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한 관계자는 "보험업권뿐만 아니라 국내 전체 금융시장을 봐도 진득하게 자율화를 제대로 추진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며 "자율화 이후 일시적인 가격 인상 등 예상했던 부작용도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원점으로 돌리니 금융규제는 절대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 자율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일침했다.

1993년에도 보험상품 허가제를 사전신고제로 전환하는 등 보험 규제를 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2015년에 금융당국이 보험에 관한 규제의 틀을 완전히 바꾸겠다며 그린 큰 그림도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보험사들은 또다시 '경쟁'이 아닌 '규제' 때문에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됐다. 게다가 이번 관성의 법칙은 원점은커녕 퇴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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