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광해수욕장. 철은 지났지만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임자도를 늦가을에 찾아간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잠시라도 고즈넉한 섬 풍경 속에 젖어보고 싶었다. 봄에는 튤립으로 온통 물들고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붐비지만, 외지인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가을 이후에는 임자 없는 시간만 널려 있는 섬이 바로 임자도다. 내가 찾아간 건 잔뜩 흐린 날이었다. 비가 그쳤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낮은 곳에 내려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빌려온 임자도에 대한 설명이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별 특별한 게 없는 섬이다. 굳이 눈에 띄는 내용을 찾는다면 깨와 관련된 설명. 임자도의 ‘임자’는 들깨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임자(荏子)다. 옛날에는 유배를 간 사람들이, 사질토에서 자라는 깻잎을 뜯어먹으며 연명할 정도로 척박한 섬이었다고 한다.
끝없는 길을 달려도 주민들을 만날 수 없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그러다 어느 순간, 반가움으로 눈이 환해졌다. 넓게 펼쳐진 밭, 밭가에 서 있는 소나무 서너 그루,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밭 가운데서 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구나…. 그 뒤로도 자전거 속도만큼 느리게 차를 몰았지만 사람 없는 풍경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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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새우젓의 고향’이라 불리는 전장포.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새우젓마트’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 앞을 얼씬거려 봐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동네를 빠져나오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7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14번째 큰 섬, 수천 명이 땅을 파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기대에 살아가고 있는 섬. 그곳에서 만난 주민이라고는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한 분뿐이라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임자도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섬, 그래서 조금 고독하고 쓸쓸한 섬. 하루 종일 앉아서 사색에 빠져도 방해할 사람 하나 없는 섬. 아! 이 모든 풍경이 나를 위해 차려진 것이었구나. 바로 내가 찾던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내 안에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뿌듯한 그 무엇. 시간은 도시보다 훨씬 천천히 흘러서, 하릴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녀도 누군가 호주머니에 자꾸 시간을 넣어주는 것 같았다. 시간마저 임자가 없는 섬에서 맞은, 생애 가장 길고 평화로운 날은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갔다.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즐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