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총알·공수부대 집단 발포…1980년 광주의 '그날'

머니투데이 이슈팀 윤기쁨 기자 2017.05.18 05:55
글자크기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 /사진제공=5·18기념재단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 /사진제공=5·18기념재단


"하나의 총알이 주방 유리창을 뚫고 맞은편 벽에 꽂혔다. 그 순간 우리들은 배를 땅바닥에 깔았다. 계속 쏟아지는 총알을 어떻게 다 피할 수가 있었겠는가. 난데없이 등에 뭐가 탁 박히며 코와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여학생의 일기)

37년 전 오늘.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싼 채 시민을 향해 군봉을 휘두르고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광주 시민들은 총탄에 목숨을 잃고 눈앞에서 가족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민주주의를 향해 한발짝 내디딘 그날,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신군부 세력 퇴진 요구로 시작…'7200여 명 희생'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후 유신독재가 끝나자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신군부 세력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전국에 계엄령·휴교령을 내리며 이를 진압한다. 18일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이 휴교령을 거부하고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에 폭행을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자 시민들은 분노한다. 이렇게 광주항쟁은 시작됐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 /사진제공=5·18기념재단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 /사진제공=5·18기념재단
2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은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계엄군은 모든 시외전화와 언론을 통제하며 광주를 고립시킨다. 신군부는 장갑차와 검을 꽂은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고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사상자가 급증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5월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키고 전남도청을 점령하지만 27일 새벽 2만5000명에 달하는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며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는 △사망 218명 △행방불명자 363명 △상이자 5088명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명으로 추정된다.



◇37년 지난 지금까지 피해자 고통 호소…'42명 자살'
긴 시간이 지났지만 5·18민주화운동 당시 피해를 입은 부상자와 가족들은 △항쟁 당시 목격한 죽음 △신군부로부터 폭행당한 기억 △환청·환각 △신체적 어려움 등으로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다. 5·18기념재단과 유족회에 따르면 이들의 41.6%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이중 29.5%가 중증 증세를 나타낸 것으로 조사됐다. 트라우마·우울증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피해자나 주변인 중에서도 4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 /사진제공=5·18기념재단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 /사진제공=5·18기념재단
당시 5·18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었던 미국 저널 오브 커머스의 팀 셔록 외신기자는 시민군에 대해 "군사정권으로부터 자신들의 민주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성들은 시민군에게 음식과 물을 나눠줬고,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은 시민군을 도시 전역으로 수송했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봤고 노소를 막론하고 시민들은 지역 병원에 몰려들어 헌혈을 했다"고 증언했다.

1980년 그날. 광주의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의 정신은 군사독재라는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