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불꺼진 '옥포 이태원', 선주의 빈자리

머니투데이 거제(경남)=안정준 기자 2017.04.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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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학교 학생수 반토막…수주절벽으로 해외 선주 근로자 썰물처럼 빠져나가

지난달 29일 경남 거제시 옥포로 일대. 화려한 네온사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우조선해양 사원 아파트 맞은편에 위치한 이 곳은 '옥태원'(옥포+이태원)으로 불린다. 조선 호황시절 대우조선 선주사 소속의 외국인 감독관과 기술자들이 모여들며 불야성을 이루던 유흥지였다./사진=박준식 기자<br>
지난달 29일 경남 거제시 옥포로 일대. 화려한 네온사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우조선해양 사원 아파트 맞은편에 위치한 이 곳은 '옥태원'(옥포+이태원)으로 불린다. 조선 호황시절 대우조선 선주사 소속의 외국인 감독관과 기술자들이 모여들며 불야성을 이루던 유흥지였다./사진=박준식 기자


지난 달 29일 밤 10시, 서울에서 다섯 시간 차를 달려 도착한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로에는 불이 들어온 네온사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우조선해양 (31,000원 ▼200 -0.64%) 사원 아파트 맞은편에 위치한 이곳은 '옥태원'(옥포+이태원)으로 불린다. 조선 호황시절 대우조선 선주사 소속의 외국인 감독관과 기술자들이 모여들며 불야성을 이루던 유흥지였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감자탕집에서 주문을 받은 루마니아 출신 마리카씨는 이날 만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3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는 그는 서툰 우리말로 "옥태원에 불이 꺼진 지는 꽤 됐다"고 말했다.

'수주절벽'으로 대우조선이 일감을 받지 못한 몇 년 사이 외국인 근로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장사하시기 힘들겠다"는 말에 마리카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길 건너에 있는 국제외국인학교 학생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고 답했다.



거제시 최대 번화가 고현동 일대에도 불빛은 없었다. 대로변에는 '창고 대방출' 현수막을 내건 '땡처리 가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몇 년 전만 해도 1평 정도의 노점상 권리금이 2000만원에 육박했던 번화가다.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거제시 유일의 백화점인 디큐브백화점은 매물로 나왔지만 사려는 곳이 없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역 경제를 먹여살리던 조선업 침체로 거제시 아파트 매매가격은 지난 2년간 7.4% 하락했다. 영화 관람객 수는 20% 줄었고 신차 등록건수는 15% 감소했다. 거제시는 올해 지방세 수입을 지난해보다 113억원 줄어든 1586억원 정도로 책정했다.

불 꺼진 거제시가 대우조선을 보는 눈은 곱지 못하다. 대우조선 옥포 조선소에 근무하는 이형진(34·가명)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대우조선 직원은 일등 신랑감이었다"며 "이제는 회사 로고가 붙은 작업복을 떳떳이 입고 다니기 힘들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대우조선 직접고용 1만여명을 비롯, 간접 고용관계에 있는 직원 수가 5만명을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한다. 직원 가족까지 더하면, 거제시 인구 26만명의 절반 이상의 생계가 대우조선에 달려있다.

천문학적 세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우조선 경영 실패에 대한 이들의 원망은 이제 참담함으로 바뀐다. 이 씨는 "이제는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혈세 먹는 하마'라는 생각이 든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 씨는 "그래도 일을 해서 배를 완성시키고 돈을 벌어 들어야 하지 않겠나"며 조선소로 향했다. 지난달 30일 오전 근로자들은 옥포조선소 서문 쪽으로 힘겹게 출근하고 있었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중앙에 위치한 '소난골' 로고가 찍힌 드릴십. 1조원 가량의 인도대금을 받지 못해 대우조선 유동성 위기의 상징이 된 선박이다. 소난골 드릴십 좌측은 선박 건조구역. 우측은 대우조선 부실의 뇌관인 해양플랜트 건조 구역이었다./사진=박준식 기자<br>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중앙에 위치한 '소난골' 로고가 찍힌 드릴십. 1조원 가량의 인도대금을 받지 못해 대우조선 유동성 위기의 상징이 된 선박이다. 소난골 드릴십 좌측은 선박 건조구역. 우측은 대우조선 부실의 뇌관인 해양플랜트 건조 구역이었다./사진=박준식 기자
조선소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소난골' 로고가 찍힌 드릴십 두 척이 보였다. 1조원 가량의 인도대금을 받지 못해 대우조선 유동성 위기의 상징이 된 선박이다. 소난골 드릴십 좌측은 선박 건조구역. 우측은 대우조선 부실의 뇌관인 해양플랜트 건조 구역이었다.

선박 건조구역은 LNG선과 쇄빙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근로자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대우조선 관계자는 "도크 7개에서 5주에 1번 선박 2척이 완성돼 인도되고 있다"며 "선박 인도 일정에 맞춰 작업은 차질없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보수적으로 예측한 대우조선의 올해 신규 수주물량은 20억 달러. 신규수주가 차질없이 진행된다 해도 20억달러의 10~20% 수준인 선수금 2억~4억달러(약 2200억~4400억원)로는 올해 회사 부족자금 3조원을 감당하기 턱없이 부족하다. 관건은 288억달러(약 32조2000억원) 규모의 수주잔량 가운데 절반 가량이 올해 인도돼 자금이 들어올 지 여부다.

선박 건조구역은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도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대우조선은 이날 해양플랜트 건조구역은 공개하지 않았다. 대우조선 위기 극복의 핵심은 사실 전체 수주잔량의 46%를 차지한 해양플랜트의 적기인도다. 조선소 인근 야산에서 본 해양플랜트 건조구역은 근로자들로 가득 찬 선박 건조구역에 비해 한적한 모습이었다.

거제의 희망은 대우조선과 함께 지역 경제의 양대 축인 삼성중공업 (9,390원 ▼40 -0.42%)에서 볼 수 있었다. 조선소 해양플랜트 건조 구역은 프렐류드(FLNG: 부유식 LNG 생산·저장·하역설비), 에지나(FPSO: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설비), 이치스(CPF: 해양가스처리설비) 등 척당 수주금액 25억달러 이상의 대형 해양플랜트로 가득 차 있었다.

해양플랜트마다 수백명의 근로자들이 달라붙어 막바지 건조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들 해양플랜트는 모두 올해 안에 인도가 된다.

삼성중공업 노사는 해양플랜트 적기 인도를 위해 진행 중이던 임금 협상도 잠정 보류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임금협상 기간에는 공정을 제대로 챙길 수가 없다"며 "위기 극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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