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대한민국 산업史를 쓰다..전자·화학 기틀 세워

머니투데이 임동욱 기자 2017.03.2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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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창립 70년]구인회·구자경·구본무 회장 '리더십' 통해 도약·혁신·지속경영 이끌어

LG의 70년 역사는 대한민국 산업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에는 개척정신과 내실성장, 그리고 혁신을 강조해 온 LG 경영자들의 고뇌와 땀방울이 배여 있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 LG 기틀 세워



LG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 LG 창업회장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무수히 만들어 낸 대한민국 산업계의 '개척자'였다.

연암은 1907년 8월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연암은 청년 시절부터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통해 경제력을 길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보다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부산으로 나와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연암은 그 해 11월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연암은 인척이었던 허만정 씨의 아들 허준구 상무와 함께 동업경영을 시작했다.

1946년 2월 화장품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화장품 판매업에 성공한 연암은 화장품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 1947년 1월 LG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럭키크림'을 생산했다. 이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다른 회사 제품보다 2배 가량 비쌌음에도 불구, 양질의 원료를 사용해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크림통 뚜껑이 파손되어 반환되는 양도 많아졌다. 연암은 파손되지 않는 뚜껑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마침 플라스틱 뚜껑이 좋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일본으로 가는 지인에게 관련 자료 구입을 부탁했다. 이후 입수한 6권의 서적을 통해 플라스틱 산업의 유망함을 알게 된 연암은 부산 범일동에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하고 1952년 하반기부터 플라스틱 빗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1954년 비닐원단 및 플라스틱제품 제조시설을 대폭 확장했고, 1955년 3월에는 럭키표 치약도 생산했다.

위기도 있었다. 1957년 군소업체들이 잇따라 진입하면서 플라스틱 산업이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다. 연암은 전자사업에 눈을 돌렸다.

금성사(현 LG전자)가 설립된 것은 1958년이었다. 설립 초기부터 국산 라디오 생산 준비에 들어가 1959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수입 제품을 선호한 탓에 판매에 애를 먹었다.

라디오뿐만 아니라 금성사에서 개발해 생산한 선풍기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정부가 밀수품 단속을 강화하면서 금성사는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시작되면서 라디오가 품절될 정도로 많이 팔렸다. 1961년의 우리나라 라디오 수신기 대수가 약 53만대였지만, 1974년에는 556만대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1966년 8월 금성사는 국내 최초로 흑백TV(19인치)를 생산하며 종합 전자업체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연암은 1966년 국내 민간업체 최초의 외자를 도입한 합작회사 호남정유를 설립하며 에너지산업 개척에 나섰고,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연구기금을 지원하기 위해 연암문화재단도 설립했다. LG의 창업자로서 경제계 및 사회적으로 역량을 발휘했던 구인회 창업 회장은 1969년 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자경 회장, 도약의 전기 마련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에 취임한 구자경 회장은 경영방침으로 ‘내실 있는 안정적 성장’을 표방했다. 이후 LG는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양 축으로 삼아 석유화학, 정밀화학, 에너지,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와 건설, 증권, 유통, 보험 및 금융 등 서비스산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혀나갔다.

1970년대 들어 LG는 10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했고, 19개의 공장을 세웠다. 또 금성사 중앙연구소와 럭키중앙연구소를 비롯해 모두 8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럭키는 여천공장을 준공함으로써 창업 이래 숙원이었던 석유화학 원료사업 진출의 꿈을 이뤘다. 호남정유는 38만 배럴 정제시설을 완공해 국내 최대 민간 정유회사로 발돋움했다.

금성사는 구미, 창원, 평택 및 청주 등 대단위 공장을 잇달아 준공하고 국내 최대의 민간기업 연구소인 금성사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1982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 생산법인인 GSAI를 미국 헌츠빌에 건립했다.

럭키그룹은 1978년 총 매출 1조원을 달성하며 국내 최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1983년 그룹 이름을 럭키그룹에서 럭키금성그룹으로 변경하고 다가올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럭키금성은 1989년 1월부터 자율과 책임경영을 근간으로 하는 사업문화 단위(Culture Unit) 경영체제를 구축했고, 1990년 2월에는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선포하고 경영헌장을 제정하는 등 21세기 경영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이념과 체제를 정립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럭키금성은 국제화와 첨단기술 개발, 신규사업 진출 등의 영역에서 큰 경영성과를 거뒀다. 화학과 에너지산업 분야에서는 원유 정제로부터 석유화학 원료, 화성원료 및 플라스틱 가공에 이르는 석유화학산업 일관체제를 구축했고, 전자산업 분야는 해외법인을 세계 주요 국가에 세우며 '글로벌화'에 시동을 걸었다.

◇LG로 새출발, '정도.투명경영'의 시작

1995년 1월, 럭키금성은 'LG'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1947년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발한 지 48년 만이다. 한달 뒤인 2월22일 구본무 회장이 3대 회장으로 취임하며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구본무 회장 취임 이후 LG는 세계를 향해 ‘정도경영’을 통한 ‘일등 LG'의 목표를 향해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이동통신, LCD, 반도체, 에너지 및 유통사업에 도전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중국과 유럽, 미주 지역에서 다각적인 세계화 전략을 통해 LG 알리기에 힘썼다.

1997년 말 우리나라에 닥친 외환위기로 LG는 큰 변화를 겪었다. 외자유치를 위한 합작, 계열사 간 통합과 사업 이관을 통해 기업체질을 강화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반도체와 카드, 증권 등 LG 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계열사를 매각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LG (81,000원 0.00%)는 2003년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며 한발 앞선 선진 경영시스템을 구축해 투명경영에도 앞장섰다.

대기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어온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고, 사업자회사는 오로지 본연의 자기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LG는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LS그룹과 GS그룹의 계열분리를 단행, 창업 이래 이어졌던 57년 동안의 구씨. 허씨 집안과의 동업경영체제도 아름답게 마감했다.

그동안 LG그룹은 구씨 가문이 경영을, 허씨 가문이 안살림을 맡는 공동경영 형태로 운영됐다. 2004년 7월 (주)LG의 인적 분할을 통해 설립한 GS홀딩스의 출범과 함께 허씨 가문은 LG칼텍스정유, LG유통, LG홈쇼핑 등 15개 회사를 넘겨받아 GS그룹을 출범시켰다.

LG계열사였던 LG전선, LG산전, LG-니꼬동제련, 희성전선, LG-칼텍스가스(현 E1), 극동도시가스(현 예스코)도 2003년 계열분리돼 'LS전선그룹'으로 분류됐다가 2005년 공식 출범한 LS그룹 소속이 됐다. LS그룹은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동생인 구태회·평회·두회 명예회장의 세 형제 집안이 공동 경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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