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봄을 공유하는 인식과 달리 때로 우리는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에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현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이는 해석과 행동의 문법을 보면 상이한 두 입장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사건이 불거졌을 때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보고 행동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왜 그럴까?
이러한 시기를 지나 지적 능력이 발달하면서 아이는 세상은 어떻다는 식의 틀, 즉 주관적인 인식의 틀을 구축해간다. 이런 주관성 때문에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판단하게 된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주관성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주관은 끊임없이 객관적인 사실과 비교하면서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주관은 결국 객관적 사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이고 비사실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 즉 정상이 아닌 것은 객관을 반영하지 못하는 주관을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왜곡된 주관성의 대표적인 현상이 종북과 좌파 혹은 수구보수골통과 같은 인식의 틀이다. 이러한 틀은 사람들을 단정적이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을 둘 중 하나로 낙인찍어 버린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비적대적 대북관계를 주장하고 미국과의 동등한 외교를 강조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좌파이고 종북이다. 또한 안보를 강조하고 경쟁과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세력에 불과하다.
이처럼 비현실적 주관성은 세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해서 폄훼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와 정반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립자에 대한 물리학의 연구결과도 그렇고, 뇌에 관한 신경생리학적 연구도 그렇고, 우리의 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철학적 사상도 그렇듯이 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의 존재를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가 소모적인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비이성적 주관성을 극복해서 사회적 문제에 공유된 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