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신념에 대한 경계

머니투데이 손동영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17.03.0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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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 시평]신념에 대한 경계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오랜 경험과 숙고, 배움을 통해 이뤄진 일종의 체화한 깨달음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강한 신념은 결국 깊은 고민에서 도출된 최종 결론이므로 신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아직 모자란 것으로 평가된다. ‘신념의 정치인’이라는 미사여구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기도 하다. 일관된 신념이 없어 보이는 정치인은 이리저리 말을 바꾸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비난받는다. 그런데 신념은 정말 깊은 숙고의 결과일까.

심리학은 사람을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로 바라본다. 쉽게 말해 생각하기를 최소화하는 존재란 뜻이다. 사실 주변환경의 모든 대상이나 현상, 과정을 세세히 관찰하고 판단해야 한다면 우리 두뇌는 자극에 압도돼 무너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중요한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관심 대상과 나머지를 구분하려면 무엇이 중요하며 나머지는 왜 중요치 않은지 결론을 먼저 내려야 한다. 신념 혹은 믿음은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일반의 통념처럼 우리는 숙고 끝에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깊은 고민을 통해 무언가 옳다고 깨닫기보다 그렇다고 믿는 대상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것이다. 배가 정박할 곳을 찾아 닻을 내리듯 인지적 구두쇠인 우리는 빨리 어떤 결론에 닻을 내리고 안정을 찾기 원한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념, 심지어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믿음이 갖는 심리적 효과는 바로 해답을 가졌다는 안정감이다. 요컨대 신념을 통해 우리는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강한 신념은 깊은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멈추는 지점인 것이다.

신념은 더 나아가 복잡한 세상을 선과 악,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가지런히 정리해준다. 이러한 구분엔 위계가 있다. 선과 악의 대화가 평등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선은 악을 꾸짖고, 가치 있는 것은 무가치한 것을 몰아내야 한다. 그렇게 모든 상황은 상대편이 굴복해야 끝나는 제로섬(zero-sum)게임으로 비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는 서로의 혈액형을 확인하듯 신념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문다. 스스로 진실과 도덕적 우위를 독점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일방적 비난이나 조롱 혹은 속칭 ‘꼰대’처럼 훈계하는 일뿐이다.



바야흐로 신념 과잉의 시대가 왔다. 전통적 언론이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넘지 말아야 할 모종의 윤리적 선을 공유하며 지나친 극단을 어느 정도 걸러냈다면 역설적이게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극단적 주장의 활로를 터주는 상황이다. 신념과 사실이 충돌하면 사실을 바꾸고 가짜뉴스라도 만들면 되니까 극단적 소수는 더 이상 상식적 다수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사실 새롭지 않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에서 사실은 늘 모종의 신념과 투쟁해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류 또한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과학적 상식 또한 여전히 어딘가에선 투쟁 중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 서는가가 아니라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는 시선이다.

“신념은 최종 결론이 될 수 없고 사실에 굴복해야 한다”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보자. “사실이 바뀌면 저는 의견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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