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글은 2015년 3월 안희정이 쓴 ‘아침단상’이라는 짧은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안희정은 페이스북 등에 올렸던 짧은 글을 모아 ‘안희정의 길, 함께 걸어요’를 냈다. 스스로 ‘자성록(自省錄)’이라 명명하며 정치인의 성찰이라고 설명했다.
혁명을 꿈꿨고 개혁을 외쳤던 안희정의 과거와 빗대면 너무 둥글다. 예전엔 모난 돌이 정 맞았다면 두루뭉술한 것은 별로인 게 요사이 트렌드다. ‘사이다’ ‘팩트 폭력’이 환호을 받는 시대에 ‘용서’ ‘사랑’은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철학자’ ‘종교지도자’에 가깝다는 비판도 충분히 나올 법 하다. 오죽하면 호까지 붙여 ‘선의’ 안희정 선생이라는 비꼼까지 등장했을까.
259일간의 구속기간을 포함, 4년4개월의 법정싸움 끝 무죄를 받은 변양호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로) 용서가 가능했다”고 했다. MB정부 황태자로 불리다 저축은행 사건으로 구속된 후 무죄로 누명을 벗은 정두언도 “경멸과 증오가 아니라 관용과 인내의 자세로 싸울 것”이라고 했다. 매일 밤 묻고 답하고 기도하며 느꼈을 그들의 고통, 그리고 얻어낸 깨달음은 존중받을 만 하다.
사람에 따라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 앞으로 갈 미래에 대한 방향을 보는 시선은 다르다. 누구는 ‘분노의 시대’를 외치고 다른 이는 ‘분노의 시대 이후’를 말한다. 분노를 거쳐야 분노 이후를 말할 수 있고 분노 이후를 알아야 분노를 지날 수 있다. 다를 뿐 그른 것은 아니다. 다른 것 중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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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은 ‘정치인의 일’이라는 단원 마지막에 ‘선한 의지’를 썼는데 앞부분에 그는 묻는다. “좋은 정치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곤 자답한다. “권력 앞에 용기있게 설 사람이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민주공화국 시대, 대화를 잘 나누는 사람, 협의를 잘 이끌어 내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고…”. 이게 안희정의 생각이다. 난 동의한다. ‘위대한’ 지도자를 꿈꾸기보다 협력하며 나라를 발전시키는 지도자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외침이 욕 먹을 일은 아니다.
문제는 글에 못 미치는 그의 화법이다. 대화를 잘 나누는 사람을 좋은 정치인이라고 했는데 아직 안희정의 대화는 어렵다. ‘소통’의 기본이 말인데 ‘선한 의지’조차 전달하지 못하면서 ‘좋은 대화’ ‘협치’를 할 수 있을까.
안희정이 쓴 ‘칼’이라는 글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모든 언어 사용은 감성의 칼을 휘두르는 일이다. 나뭇가지 하나도 베어 넘길 수 없는 칼이지만 그 칼은 사람을 절단 낸다. 하지만 그 칼은 채찍 같아서 종종 제 눈알 빼가기도 한다.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 적잖은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안희정도 안다. 힘든 선거 과정, ‘선한 의지’ 못지않게 ‘칼’도 가슴에 담고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