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신사임당과 ‘가출소년’ 이율곡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7.02.2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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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4 – 신사임당 :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박제되다

‘워킹맘’ 신사임당과 ‘가출소년’ 이율곡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 외로이 서울로 떠나는 이 마음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바라보니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에는 대관령을 넘다가 친정인 강릉 오죽헌 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결혼 후에도 어머니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친정에서 거처해온 사임당은 38세 때 시댁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에 정착한다.



신사임당과 같은 선비의 아내들은 대갓집이 아닌 이상 ‘워킹맘’의 삶을 살았다. 집안일은 물론 생업까지 여인들이 책임진 것이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요즘으로 치면 고시생이었다. 과거공부 등에 매진하느라 살림을 돌보지 못했다. 밥벌이는 그래서 아내들의 손에 맡겨지기 일쑤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그 실상을 ‘사소절(士小節)’에 남겼다.

“선비 아내는 방적과 양잠이 본업이요, 치자를 들여 염색하고, 장과 초와 기름을 팔며, 대추와 밤과 감을 내어 생계를 돕는다.”



그러고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물림했다는 곳간 열쇠도 마냥 특권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것은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과 옹색함이 켜켜이 쌓인 애물단지였다. 그녀들은 바느질과 길쌈으로 밥벌이를 했다. 빈번한 제사와 손님맞이를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기도 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치르는 비용도 여인들의 옷장 깊숙한 데서 나왔다.

이들 ‘조선판 워킹맘’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현모양처(賢母良妻)’, 곧 현명한 어머니이자 훌륭한 아내였다. 어찌 보면 가정경제의 대차대조표가 그녀들의 수완에 달려 있었기에 현명하고 훌륭한 자질을 요구한 것이다.

사임당 역시 숙명과도 같은 현모양처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연로한 시어머니를 대신해 맏며느리인 그녀가 넉넉지 못한 시댁 살림을 도맡았다. 자연히 그림 그리는 일은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의 감수성마저 억제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시나브로 친정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갔다. 그곳은 예술의 뿌리인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일군 소중한 장소였다.


“어머니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워했다.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지으며 우셨다. 어느 때는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다.”

신사임당의 셋째아들 율곡 이이가 회상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이의 ‘선비행장(先妣行狀)’에는 사임당의 말년이 잘 드러나 있다. 1551년 여름 그녀는 공무로 평안도에 출장 나간 남편에게 눈물로 쓴 편지를 띄웠다. 율곡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무렵 이원수가 첩을 두고 외도를 시작했다는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얼마 후 신사임당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원수의 출장길에 동행했던 율곡은 돌아오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데다 아버지가 냉큼 첩을 집에 들이자 그는 상심에 빠졌다. 16살 소년은 사임당의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삼년간 시묘(侍墓)를 행한 다음 집을 나갔다. 승려가 되겠다며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비록 1년 후 하산했지만 이 가출 행보는 유학자로서 흠집 잡히는 빌미가 되었다. 이이는 그 뒤 구도장원(九度壯元 : 과거시험의 아홉 관문에서 일등을 차지함)의 명성을 얻으며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를 완성했다. 율곡은 사후 서인의 종주로 추앙을 받았는데, 퇴계의 후예인 남인은 ‘선비의 탈을 쓴 중’이라고 그를 깎아내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서인계가 강성해지면서 이율곡과 신사임당은 본의 아니게 꽃가마를 타게 된다. 서인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은 율곡선생을 높이기 위해 어머니까지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물론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임당이 아니라 삼종지도와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박제된 이미지였다. 화가로서 그녀의 진면목과 조선시대 워킹맘들의 실상은 가부장 중심의 역사에 가려진 채 오늘도 답답한 한숨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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