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지도’ 나라에서 ‘사임당’으로 살기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7.02.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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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3 – 신사임당 : 안견에 버금간 당대 최고 화가

‘삼종지도’ 나라에서 ‘사임당’으로 살기


삼종지도(三從之道)! 조선시대 여성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섬기며, 늙고 나면 아들에게 의지하는 삶을 강요받았다. 그녀들의 존재이유는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집안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여인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으면 욕먹었다. ‘여자는 재주 없음이 곧 덕(女子無才便是德)’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가 베일을 벗었다. 신사임당은 오늘날 5만원권 지폐의 도안인물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이자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대명사다. 그러나 삼종지도라는 잣대를 대면 의외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녀는 이미지와 달리 남편에게 순종적이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또 이율곡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본인이 화가로 이름 높았다.



사임당의 행적은 친정이자 외가인 강릉 오죽헌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녀는 이곳에서 딸부잣집 둘째딸로 태어났다. 흥미로운 점은 아버지 신명화와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처가를 중심으로 결혼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이렇게 모계 거주지에 뿌리 내리는 우리나라의 옛 결혼문화가 남아있었다. 어찌 보면 여성 친화적 환경이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손녀가 그림에 뜻을 두자 값비싼 도구와 재료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기묘사화에 연루될 만큼 이름 있는 선비였던 아버지도 딸에게 시문과 글씨를 가르쳤다. 집안어른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엄친딸’로 키우려 한 것이다.



19세 때 남편 이원수와 혼인한 것도 어른들의 배려였다. 이원수는 권신 이기의 당질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 반면 사임당의 외가는 강릉 일대의 부유한 세력가였다. 쇠락한 시댁으로서는 ‘화가’ 며느리를 대놓고 간섭하기 어려웠다.

덕분에 사임당은 혼인 후에도 친정어머니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20년 가까이 오죽헌에 머물렀다. 이율곡을 비롯해 아이들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남편은 과거공부를 하면서 본가인 파주 율곡리와 강릉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그녀는 삼종지도의 길에서 살짝 비껴서 있었다. 그 자그마한 운신의 자유가 ‘불세출의 여류화가’를 만든 것이다.

“사임당의 산수와 포도는 평하는 이들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가벼이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랴.”


조선 중기의 문인 어숙권은 수필집 ‘패관잡기(稗官雜記)’에 화가 사임당에 대한 당대의 평을 실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안견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녀의 그림이 최고 수준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사임당은 어린 시절 그이의 그림을 모사(模寫)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평소에 묵적(墨跡)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다.”

이율곡이 쓴 ‘선비행장(先批行狀)’을 보면 그녀가 안견의 산수도를 모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등장한 ‘금강산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사는 그림 배우는 사람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쓰는 방편이다. 이후 사임당은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산수와 포도에서 독보적인 경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화가로 승승장구하는 사이 집안에는 우환이 싹텄다. 유명화가인 아내에게 열등감이라도 가졌던 것일까. 남편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음서(蔭敍)로 한강 수운을 감독하는 관리가 되었다. 이원수는 그 길로 주막집 여인과 정을 통하고 살림을 차렸다. 조선은 법적으로 일부일처제 국가였지만, 양반 남성들은 벼슬만 얻으면 축첩(畜妾)에 나섰다.

“여보, 나 죽은 뒤에 장가들지 마세요. 7남매(4남 3녀)나 두었으니 더 구할 것도 없잖소.”

자존심 강한 신사임당은 남편의 ‘첩질’로 인해 가슴앓이 하다가 뼈 있는 말을 남기고 48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삼종지도의 나라에서 사임당 자신으로 살다가 떠났다. 그것만으로도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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