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전 오늘…청년 전태일, 불꽃으로 산화하다

머니투데이 이슈팀 조현준 기자 2016.11.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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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근로기준법 준수" 외치며 분신자살…노동운동 불 지펴

평화시장 화장실 옆에 걸터 앉은 전태일(왼쪽)과 재단 보조사/사진=전태일재단 제공평화시장 화장실 옆에 걸터 앉은 전태일(왼쪽)과 재단 보조사/사진=전태일재단 제공


46년 전 오늘…청년 전태일, 불꽃으로 산화하다
46년 전 오늘(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스물 두 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며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시위는 무위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그 순간 전태일은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불타는 몸으로 사람들이 서성이는 거리로 뛰쳐나와 마지막까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다가 쓰러졌다.

전태일의 몸을 삼킨 불길은 3분가량 타다가 꺼졌다. 당시 그 자리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법전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어 전태일의 한 친구가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전태일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10시 사망했다.



당시 노동현실은 '분신 투쟁'으로 호소해야 할 만큼 열악했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10대 여공들은 똑바로 설 수조차 없는 다락방에서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하루 8시간 노동', '정기 건강검진' 등을 규정한 노동법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노동청 근로감독관도 허수아비였다.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대 법대생 100여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상대생 400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11월20일 서울시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노동자 인권을 보장하라는 공동 시위를 벌였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이후 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신민당 당사는 노동자 시위대가 경찰의 탄압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피신처로 쓰였다.


전태일 정신을 이은 분신 투쟁도 이어졌다. 1970년 11월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식당)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등이 일어났다.

노동운동에도 불길이 피어올랐다. 전태일이 사망한 다음해인 1971년 노동자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달했다. 이는 1970년 165건에 비해 10배에 가까운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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