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금지법' 한달, 납작 엎드린 로펌街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16.10.29 06:15
글자크기

[the L]

시민단체 활빈단이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오전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청탁금지법 꼭 지키자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사진=홍봉진기자시민단체 활빈단이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오전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청탁금지법 꼭 지키자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사진=홍봉진기자


"훨씬 조심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이미 법이 시행된 만큼 '안걸리면 되겠지'라는 마음가짐은 위험하다. 내가 법에 저촉되면 양벌규정으로 인해 회사에도 폐를 끼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더 몸을 사리게 만든다."

국내 한 대형로펌에 근무하는 A변호사의 얘기다. 28일로 시행 한 달을 맞이하는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으로 식사·주류접대나 골프접대 등 기존에 성행했던 영업방식이 모두 금지된 이후 로펌가도 납작 엎드린 모습이다.



구체적인 케이스에 법이 어떻게 적용될지 기준이 모호한 상태이기 때문에 별도의 지침이나 판례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스탠스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공기관 등에 대한 국민신뢰를 높이겠다는 법의 기본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일상적인 소통방식 전체를 싸잡아 불법화시켜 불편함을 키우는 경우도 많다는 지적이다.

골프접대나 술접대는 커녕 당장 식사약속 자체가 크게 줄었다는 평가다. 한 소형로펌 소속의 B변호사는 "그간 만나왔던 공공기관·정부 관계자는 물론 연수원 동기모임과 같은 정례적 모임도 모두 줄었다"며 "영업차원에서 만나 밥을 먹고 얘기를 하려고 해도 상대방에게 금전적 부담을 지운다는 생각에 모임을 잡자는 제안 자체를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내가 밥을 사면서 자리를 만들어 식사를 겸한 비즈니스 미팅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미팅을 잡자는 자체가 청탁금지법 적용대상인 상대방에게 돈과 시간을 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에서다.

상대방이 법 적용대상자인지 여부를 미리 확인하고 미팅을 잡아야 하는 경우도 잦다. '청탁금지법' 2조는 법 적용 대상이 되는 이들로 공무원, 공공기관 임직원, 교직원, 언론사 임직원 등을 규정했지만 일정 공공기관 업무를 위탁받은 민간인을 '공무수행사인'으로 규정하고 이들도 법 적용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 법 적용대상자들이 식사·주류 등 접대를 받는 자체가 법 위반이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접대를 제공하는 이도 법을 위반하게 된다. 사실상 법 적용대상자와 만나는 모든 이들이 잠재적인 법 위반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한 대형로펌에서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는 C씨는 "업무상 미팅을 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법이 정하는 '공직자 등'에 해당하지 않는 민간인일지라도 사전에 '공무수행사인'에 걸리지 않는지 등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 신경써야 할 요소가 하나 더 늘어난 터라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토로했다.

또 "미팅보다는 전화로 얘기하자는 경우도 늘었고 전화로도 혹시나 '청탁'에 해당하는 말이 나올지 항상 신경을 써야 한다"며 "시범케이스로 누군가가 미리 적발돼 해당사안에 대해 어떤 판결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전화를 통한 소통이 원활한 것도 아니다. 청탁과는 무관한, 일상적인 사건진행 등 절차에 대한 문의를 위한 전화도 어려워졌다는 지적이다.

과거의 기본적인 소통방식 자체에 제동이 걸리다보니 불만의 목소리들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A변호사는 "당초 '벤츠여검사'(현직검사가 내연관계인 변호사로부터 벤츠리스료 등을 제공받은 대가로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은 사건, 직무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결)와 같은 경우를 단속하고자 만든 청탁금지법이 당초 취지를 살리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 의문"이라며 "기본적인 소통자체를 불법화시켜 부작용을 키우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또 "예를 들어 판사는 변호사보다 훨씬 보수적인 직역인데 이들이 청탁금지법으로 인해 느끼는 양벌규정의 무거움은 훨씬 크다"며 "판사들이 문을 더 꼭 닫고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면 과연 바람직한 법관상을 만드는 데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학연·지연 등 기존 인맥형성 고리가 훨씬 더 강화돼 소통의 불투명성을 더 키우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D변호사는 "'더치페이'(각자계산)를 제안해도 하나도 껄끄럽지 않은 기존의 친분있는 사람들과의 미팅비중이 훨씬 늘어났다"며 "공공기관 신뢰를 높이고 사회전반의 건전성을 높이겠다고 만든 법이 되레 비공식적인 인맥을 훨씬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한 대형로펌의 E변호사는 "청탁금지법은 단 24개 조항으로 사실상 모든 소통방식을 바꿀 것을 규정하고 있어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모호하다는 한계가 있다"며 "이 모호함을 보완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탁금지법을 불편해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지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더엘(the L)에 표출된 기사로 the L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기사를 보고 싶다면? ☞ 머니투데이 더엘(the L) 웹페이지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