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는 자산이나 금융소득이 별로 없는 보통사람들과는 무관한 제도다. 이에 비해 김영란법은 대상자인 공직자 교직원 언론인 등 400만명은 물론이고 이들과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들도 법 적용을 받기 때문에 사실상 전 국민이 대상이다. 게다가 김영란법은 밥 먹고 술 마시고 경조사에 오가는 등 보통사람들의 실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더욱이 주무부처인 국가권익위는 법 해석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함으로써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제 김영란법은 시행 초기 전 국민을 꽁꽁 묶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사람들은 자기돈을 내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게 아니라 만남 자체를 기피한다. 오해를 사는 게 싫고 각자 계산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영란법은 교사와 공무원과 언론인의 배우자가 낀 동네 소모임조차 해산시킬 정도다.
그 결과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실직 위기에 내몰리고 대리운전기사는 일거리가 반토막났으며 화훼·한우농가들은 몰락의 위기를 맞았다. 김영란 전 위원장께 “어쩌면 세상물정을 그렇게도 모르실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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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을 탄생시킨 또 다른 주역은 19대 국회 정무위원회 간사로 일한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과 김기식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김용태 의원은 학생이 스승에게 캔커피나 카네이션 꽃을 주는 것도 법 위반이라고 해석하는 권익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과연 정당한 비판인가. 김영란법은 다른 법들과 마찬가지로 주무부처인 권익위와 국회가 협의해 만들었다. 그래놓고는 이제와서 모든 것을 권익위 탓으로 돌리는 건 말도 안 된다.
김영란법을 ‘더치페이법’이나 ‘저녁이 있는 삶’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반대로 김영란법을 서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실생활에서 불편을 초래하는 법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건 너무 단편적이다.
김영란법의 근원적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고 만남을 끊어버리고 고립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사회관계망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언론인과 교직원을 포함한 것은 치명적 잘못이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끊어지고 만남의 고리 역할을 하는 매개체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다. 그런 곳에서는 어떤 역동성도, 어떤 창의성도 기대할 수 없다.
주역의 64괘 중 가장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천지비’(天地否)다. 소통되지 않고 막힌 상태를 말한다. 공자 등 성현들은 천지비의 괘를 이렇게 해석한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만물이 서로 통하지 못한다. 상하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소인의 도는 장성하고 군자의 도는 소멸한다.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
김영란법을 제안하고 만든 사람들의 순진함과 단순함, 포퓰리즘, 나아가 철학의 빈곤이 안타깝다. 이제 우리에겐 대가를 치르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