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김영란법 시대 가족의 재발견

머니투데이 배성민 증권부장 2016.09.2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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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자식들 탓이다. 올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뉴스를 장식한 인물들의 마음속 변(辯)이다.

먼저 이제는 전(前) 공사가 된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의 외교관 태영호. 아버지가 항일 빨치산 1세대로 알려지며 백두혈통으로도 불렸던 인물이다. 그런 태 전 공사 가족의 한국 귀순은 둘째 아들의 영국 명문대 진학과 태 공사의 북한 복귀를 앞둔 시점에 단행된 것으로 보인다는게 영국 언론들의 보도였다.

올 여름 임기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태 전 공사는 차남의 학업에 지장이 생길 위기에 몰리자 자식의 장래를 위해 탈북을 결심했을 수 있다는 해석이 제기되는 것이다. 해외 최전선에서 체제 우위를 강변하던 이데올로그가 ‘지극히 사적인’ 아들의 장래문제에 흔들린 것이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현직 부장판사 김모씨. 대법원장까지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했던 전대미문의 법조 게이트의 그늘에도 일그러진 부정(父情·不正)이 개입됐을 수 있다. 김 부장판사는 정 전 대표로부터 외제 중고차 레인지로버를 수천만원 싸게 매입하기도 했다. 특히나 눈길을 끄는 대목은 판사의 딸이 네이처리퍼블릭이 후원하는 미인대회에 출전해 1등을 하기도 했다는 것.

아버지는 딸의 미인대회가 인정하는 공인미녀 등극에 정운호 전 대표에 대한 경계심을 푸는 것을 넘어서 무장해제(?) 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어머니라면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소개받거나 심사위원을 알음알음 찾는 정도였겠지만 아버지의 부정은 차원이 달랐다는 평가다. 대회 전체의 판을 뒤흔들어놓았으니 말이다.



# 다 가족들 덕(탓)이다. 삼성, SK, 롯데, 아모레퍼시픽 등 굴지의 기업의 공통점은. 한국적(또는 동양적) 가족문화의 핵심처럼 여겨졌던 장자상속에서 어느 정도 빗겨나 있는 기업들이다. 선대회장들은 후계자로 맏아들을 선택하지 않았거나 기업이 나눠진뒤 형제들과 그룹의 운명이 갈린 경우다.

앞서 낙점됐던 삼성의 후계자 고 이맹희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내쳐진뒤 재기하지 못 했다. 한비(당시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책임을 지게 된 그는 제일비료라는 회사를 꾸려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반면 3남 이건희 회장은 3백 산업(밀가루. 설탕. 섬유) 중심이던 그룹의 물길을 전자산업으로 통째로 바꿔놓았다. 할아버지 이병철 선대회장은 정보당국에서 고초를 겪는 일도 있었지만 아들에 이어 손자는 십수억 인구의 중국과 인도 최고 지도자까지 쉽게 만날 정도의 글로벌 비지니스 거물로 성장했다.

SK는 창업회장이 일찍 타계하면서 동생(고 최종현 회장)이 섬유 등 중심이던 그룹을 정보통신과 석유화학 등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최종현 회장의 아들인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는 등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롯데와 아모레퍼시픽은 더 드라마틱하다. 롯데는 검찰수사 등으로 구설에 휩싸여있긴 하지만 제과 중심의 기업에서 유통과 화학 등 국내와 해외를 포함해 직간접고용인원 35만여명의 글로벌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장자는 일본롯데를 맡았고 차남은 국내 중심으로 사업을 꾸려나가면서 인수.합병(M&A)와 사업다각화 작업을 이어갔다. 확장과 승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검찰의 칼끝에 서게 된 차남의 운명에 따라 롯데는 또다시 기로에 서 있다. 이들 기업 일부엔 송사나 가족간 갈등으로 빚어진 비극도 내재한다.

개성상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은 옛 태평양그룹의 아들들의 운명은 더 극적이다. 차남인 서경배 회장은 방문판매원 중심의 태평양화학을 유커(중국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없어 못 판다는 아모레퍼시픽으로 환골탈태시켰다. 그는 과학분야의 노벨상 후보를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가족은 영어로는 패밀리(family)지만 패밀리(영화 ‘대부’나 ‘친구’에서나 나옴직한)로만 쓰면 음습한 기운이 덧씌워진다. 공직자 청문회에서 무시로 등장하는 위장전입, 취업청탁 등 도덕불감증, 가족이기주의가 대표적이다. 어쩌면 이 같은 그늘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성공 지상주의자들의 미안함 때문이라고도 한다.

9월28일(일명 ‘김영란법 시행일’)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 기점일 수 있다.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나온 ‘저녁이 있는 삶’이란 미완의 공약 실현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이들에게 접대와 회식에 쩔어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려줄 수 있고 청탁으로 사실상 합법화된 새치기가 오롯이 제대로 된 줄서기로 바뀐다면? 가족 탓이 아닌 가족 덕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다면? 시작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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