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전 오늘…'2차 세계대전' 일본, 항복 선언하다

머니투데이 이슈팀 조현준 기자 2016.08.10 06:00
글자크기

[역사 속 오늘] '일왕제 유지' 조건 포츠담 회담 수용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출처=위키피디아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출처=위키피디아


71년 전 오늘…'2차 세계대전' 일본, 항복 선언하다
1945년 5월 유럽의 전화(戰火)가 꺼졌다.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면서다. 삼국동맹에 참가한 나라는 일본만 남았다. 일본의 신중한 강화파 관료들은 전쟁 종결 얘기를 꺼냈다. 육군 강경파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미국, 중국, 영국 3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과 '전면적인 멸망' 사이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른바 포츠담 선언의 내용이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왕제 유지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지배층은 일왕제가 폐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강화파든 강경파든 마찬가지였다. 스즈키 수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했다. 일본 국민에게는 승리할 때까지 싸운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원폭 투하로 반격했다. 8월6일 오전 8시15분.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B-29 폭격기가 핵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뜨린 직후였다. 사람과 건물이 증발했다.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히로시마 시민 35만명 가운데 14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도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Fat Man)은 3만5000명의 인명을 집어삼켰다.

71년 전 오늘(1945년 8월10일) 일본은 연합군 측에 항복의사를 전했다. 2번의 원폭 피해로 혼비백산한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용했다. 그러나 일왕제마저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일본은 일왕 지위 보전을 항복 조건으로 달았다.



연합국은 그러나 이를 거절했다. 8월14일 일본 최고 회의가 열렸다. 군인들은 끝까지 싸우다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일왕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전쟁은 파괴만을 지속시킨다는 소신을 갖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도쿄에 원폭이 투하될 가능성이 두렵기도 했다.

이튿날인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일왕의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300만 일본군은 차례차례 무장을 해제했다. 항복 결정에 반발한 수많은 일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전 후 국제 여론은 일본의 일왕제에 극히 비판적이었다. 일왕은 군의 통수권자이므로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왕제 폐지도 요구했다.


일본 국민의 여론은 절대적으로 일왕제 존속에 기울어져 있었다. 미국의 지일 인사들도 일왕이 일본사회의 안정요소라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본국 정부에 "일왕을 전범으로 재판하면 100만의 군대를 재투입해야 할 것이다"는 기밀전문을 보냈다.

결국 미국은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기소하거나 퇴위시키지 않았다. 일왕제도 존속되었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안정시키는 한편 그들을 살려 둬 동북아시아에 불어 닥칠 냉전에 대비한 방패로 쓰려고 했다.

이 판단으로 미국은 훗날 전쟁 피해국들로부터 두고두고 원성을 사게 된다. 전쟁에 책임이 큰 일왕 일가에 대해 아예 죄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