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4년 전 오늘… 12억명 이슬람교 창시자 영면하다

머니투데이 박성대 기자 2016.06.08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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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이슬람교 예언자·선지자 무함마드 타계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를 표현한 그림./출처=위키피디아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를 표현한 그림./출처=위키피디아


1384년 전 오늘… 12억명 이슬람교 창시자 영면하다
서쪽에는 비잔틴제국, 동쪽엔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거대국가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삶을 꾸려가던 아랍인들은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수백의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이들은 아라비아반도 남부일대에서 통일된 민족 정체성, 강력한 정치체계 없이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이런 배경에서 서기 570년 메카의 귀족인 하삼가(家)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유년기에 어머니마저 잃고 숙부 손에 크고 있었다. 그는 목동일을 하면서 숙부를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과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무역일을 배우며 자랐다.



무함마드는 25세에 15살이나 연상인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해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그는 금식을 하며 사색을 통해 진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흔살이 되던 610년 히라 산(山)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다 신의 계시를 받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천사장 가브리엘의 "너는 신의 사자(使者)다"라는 음성을 들은 뒤 '코란'을 전송받은 것. 그는 이후 예언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무함마드는 전능자·창조주·심판자 '알라' 중심의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창립하고 설교를 시작한다.



초기엔 주변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해 친척과 친구들을 포함해 소수의 신도를 얻는다. 하지만 다신교를 믿던 대다수 메카인들은 그의 메시지에 강력히 반발했고, 탄압과 살해 시도가 이어졌다.

결국 심한 박해를 못 이긴 무함마드는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게 된다. 이슬람에선 이를 '헤지라'라고 부르는데, 이주가 일어났던 아랍력의 첫날인 622년 7월 16일부터 이슬람교의 기원을 둔다.

헤지라로 인해 이슬람교는 최초의 종교공동체(움마)를 갖추게 된다. 무함마드는 이어 '메디나의 헌장'을 채택해 공동체의 최종결정권을 장악해, 강력한 '신정일치' 체제를 세운다.


그는 마호메트는 메디나에 있던 유대인 세력을 배제하고 이슬람교의 아랍화를 추진한다. 동시에 다신교가 다수를 이루던 메카 세력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여 승리하면서 아라비아반도 내 이슬람 세력을 급속도로 팽창시킨다.

결국 628년 메디나 이슬람 세력에 밀려 휴전했던 메카는 2년 뒤 무함마드가 1만명을 이끌고 오자 그대로 항복한다. 메카에 무혈입성한 무함마드는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쳤고 모든 무슬림들이 따라 외쳤다. 이어 그는 다신교의 중심이던 카바 신전에서 유일신 알라를 상징하는 흑석만을 남긴 채 다른 우상의 상징물들을 전부 파괴한다.

메카 점령 뒤 이슬람 세력은 비잔틴제국이 지배하던 시리아에 원정대를 보내는 등 세력 팽창에 힘을 쏟는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려면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복 전쟁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한다. 거의 모든 아랍 부족들이 움마의 구성원이 되겠다는 협정도 체결한다.

그러던 중 무함마드는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와 갑자기 고열과 두통을 동반한 병에 걸려 1384년 전 오늘(632년 6월 8일) 영면한다. 무함마드의 타계 후 이슬람교는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게 된다. 하지만 그가 아들 없이 타계하면서 승계 문제가 불거졌다.

메카의 주류 무슬림들은 마호메트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를 1대 칼리프로 선출하며 수니파가 된다. 반면 메디나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후계자로 여겨 아부 바크르의 계승에 반대하며 시아파를 형성했다.

이후 이슬람교는 여러 제국을 거쳐 퍼지면서 현재는 약 12억명의 신도를 이루는 거대 종교세력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하지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현재까지도 분쟁을 이어가며 여러 희생자를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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