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보리가 익을 때면 남도로 간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6.06.0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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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또다른 희망의 시작점, '땅끝'에서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금 남도 땅에는 가는 곳마다 보리밭이 바람에 일렁인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지금 남도 땅에는 가는 곳마다 보리밭이 바람에 일렁인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누가 이 계절에 적당한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보리가 익는 남도로 가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게 얼마나 불친절한 대답인 줄은 안다. 남도라니? 대개 짐작은 하지만 딱 꼬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물어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내게 한반도 남쪽으로 가는 길은 모두 남도이기 때문이다. 박목월의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도 남도 길이고, 한아운의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도 남도 길이다. 그러니 남쪽 어디라도 괜찮다. 보리가 익는 곳이면 다 좋다.

마침 며칠 전 남도에 다녀왔다. 작심하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해남의 한 중학교에서 열린 ‘시 읽어주는 행사’에 초대받아 간 참이었다. 시인과 학생들이 어울려 시를 낭송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아이들이 시를 받아들이는 수준은 생각보다 높았다. 행사를 마치고 그냥 돌아오려니 너무 아쉬웠다. 여행을 자주 다닌다고는 하지만 해남까지 갈 기회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찾아온 지인 몇 사람과 땅끝마을을 들러 가기로 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남도 여행은 목적지보다 그곳까지 가는 과정이 더 좋다. 차가 드문 길을 천천히 달리면서,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을 가슴에 담는 건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다. 남도의 산들은 모나거나 각박하지 않다. 첩첩 수묵화를 그리며 가까이 왔다 물러서는 풍경은 둥글고 넉넉한 옛 친구를 닮았다. 산자락마다 품은 무덤까지도 정겨운 여정이었다. 그 사이로 가르마처럼 오르다 꼬리를 감추는 오솔길….

사람 사는 마을은 또 얼마나 정겹게 손을 내미는지. 장미가 흐드러진 낮은 돌담 집에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한낮의 볕을 피해 둘러앉은 촌로들의 넉넉한 웃음이 있었다. 노인들의 얼굴 어디에도 노년 특유의 쓸쓸함은 보이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 탁주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길을 재촉했다.



사자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다도해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사자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다도해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남도 땅은 누가 봐도 기름지다. 그 땅이 온갖 생명들을 키워낸다. 전날 내린 비로 들은 또 얼마나 넉넉해졌던지. 모내기를 마친 논과 늦은 써레질을 하는 논이 바둑판의 흑백 돌처럼 교대로 펼쳐졌다. 이랴! 이랴! 소몰이 소리가 들리지 않은지는 오래지만 농사로 분주한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물을 잔뜩 머금은 논들은 구름과 산들을 품에 안고도 넉넉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거기 보고 싶던 보리밭이 있었다. 지금은 보리가 익는 계절, 들판이든 골짜기든 눈길 닿는 곳마다 황금빛 풍요가 일렁거렸다. 이미 수확을 마친 곳도 많았다. 이 땅에서 보리농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남도에서는 여전히 보리를 심고 거둔다. 대지는 얼마나 많은 물감을 숨겨놓고 있길래 그 넓은 보리밭을 빠짐없이 황금빛으로 채색한 것일까.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보리밭 어디쯤 어린 적 두고 온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 높이 솟아오르던 종달새…. 차에서 내려 밭둑길을 걸었다. 노랫말대로 어디선가 ‘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자꾸 돌아보았다.


보리밭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우고도 굳이 땅끝까지 간 이유는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땅끝은 말 그대로 육지가 끝나는 곳이다. 한자를 빌려 토말(土末)이라고도 부른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지만 ‘땅의 끝’이라는 의미 덕에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하면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1946년에 쓴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땅끝의 해남에서 서울까지 1000리길, 서울에서부터 북쪽 끝인 온성까지 2000리이기 때문에 여기서 ‘3000리 강산’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쓰여 있다. 마을 뒤쪽의 사자봉 전망대에 오르면 반도가 뻗은 마지막 땅의 뿌리와 바다가 낳은 흑일도·백일도·노화도 등 수려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은 한라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땅끝은 세상이 끝나는 종착점이 아니라 바다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니 또 다른 희망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남도에서 돌아오는 길은 행복했다. 스르륵 스르륵 생을 부비는 보리들의 노래를 담고, 바다에서 푸른 희망을 캐오는 길. 이맘때 남도로 가면 부자가 돼서 돌아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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