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대기업 부장으로 있는 A 씨는 최근 전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과거의 동료 10여명은 뒤풀이 자리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들이 몸담았던 직장은 한때 재계 서열 11위까지 올랐던 STX그룹. 지금은 모두 다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STX맨'이었다는 데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다. 회사의 슬로건을 건배사로 외친 것도 그 때문이다.
STX조선해양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STX그룹을 이끌었던 강덕수 회장은 대표적인 '흙수저'다. 상고를 나와 1973년 고졸사원으로 쌍용양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쌍용그룹이 쌍용중공업 지분을 매각하자 전 재산 20억여원으로 지분을 인수, STX그룹을 창업했다. STX조선해양, STX에너지, STX팬오션 등 계열사를 늘려갔고 STX그룹은 재계의 판도를 흔들었다.
A 씨는 "국내에 조선소를 지으려 했지만 소음, 공해 등을 이유로 주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며 "하지만 중국 정부는 조선소를 지을 땅을 무상으로 지원한 데다 도로를 놔주고, 도크를 지을 곳의 수심이 나오지 않자 준설까지 해 줬다"고 말했다.
'샐러리맨의 신화'는 강 회장에게 붙은 이름이었지만, 구성원들은 '샐러리맨의 로망'이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5년만에 과장을 달았던 B씨. 그는 STX를 '신입 사원들에게 복사만 시키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회사'로 기억한다.
"주니어들도 사업 제안을 해서 채택이 되면 책임자가 돼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기회를 줬어요.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제안이 많았고, 부서간 협업도 잘됐어요. 그 어느 회사보다 자발적이고, 역동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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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씨는 "누구에게 얼마만큼 몫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신화에 동참해 같이 만들어 간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회상했다.
물론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순식간에 '루저'가 된 STX맨들은 당시 경영진에 반감도 적지 않다. STX그룹의 실패는 결국 '샐러리맨 신화'의 한계였다는게 이들의 지적이다. STX그룹 계열사 간부 출신 C 씨의 얘기다. "STX 대련 투자에 대해 한 임원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고 해요. 하지만 자신감이 강했던 강 회장은 밀어붙였죠. '정을 맞은' 사람이 나온 뒤로 누구도 충언을 하기가 부담스러워졌어요."
그러면서도 'STX맨'들은 STX의 실패만 부각되고 도전은 잊히는 게 못내 아쉽다. B 씨는 "굴지의 기업 총수조차 한번 실패하면 재기가 막혀 있는 사회인데, 청년창업자들은 오죽하겠나"라고 말했다.
사업 실패의 책임은 분명히 경영자가 질 몫이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까지 잊어버리고 폄하하면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수저계급론'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