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천리를 가면 행복의 만리가 온다'고 주민 기만하는 북한정권

머니투데이 강석승 동북아교육문화진흥원장 2016.05.2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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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단둥땅’에서 바라본 북한 답사기①

'고난의 천리를 가면 행복의 만리가 온다'고 주민 기만하는 북한정권


최근 중국내 북한식당 종업원 및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대좌등 고위급 탈북인사의 입국소식(?)이 내외 매스컴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중국의 협조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 발생한 배경은 무엇인가?

지상파방송을 비롯한 주요 케이블방송에서도 서로 앞을 다투어 나름대로 섭외한 북한전문가(?)를 초청하여 그 배경과 원인분석을 하느라 매우 분주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한당국은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것 자체에 대해 함구(緘口)하거나 또는 “남조선당국이 꾸며낸 자작극”이라며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물론 주요 계기시마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전면부인하거나 조작.날조라고 주장하는 선전선동에 이골이 나있는 북한”이기에 그 구체적 실상은 좀 더 시일이 흐른 후에야 ‘사실(Fact)’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돌이켜 보면, 북한당국의 이런 “함구나 부인”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그동안 북한당국이 주요 게기시마다 상투적으로 벌여왔던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막가파식 행태”이거나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기 식”의 억지춘향식 궤변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북한의 본색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직접 북한땅으로 들어가 살펴보는 것이 당연한 순리(順理)이나 155마일에 걸쳐 전개되어있는 휴전선을 넘나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설령 북한땅을 밟는다 해도 이중삼중의 감시통제장치를 뚫고 원하는 객체를 접하는 것도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 그 때문에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의 전언(傳言)이나 그곳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의 증언, 아니면 북한과 가장 가까운 중국 등 북한의 동맹국들로부터 관련정보나 자료를 입수하여 분석, 평가하는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바로 이런 현실과 관련하여 북한.통일문제만을 오롯이 30년 이상 연구.분석해 온 필자로서는 최근 ‘눈에 띠는 사안’을 먼 발치에서나마 눈으로 어렴풋이 확인(?)하고자 “중국땅에서 바라본 북한.답사기”라는 제목으로 그 편린(片鱗)을 전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지난 1980년대초부터 현재까지 국내 유수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통일·북한’ 관련 강의를 해 왔으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중국의 접경지대, 그 중에서도 두만강변의 도문(圖們)이나 단둥(丹東), 엔벤(延邊)은 한번쯤 다녀와야 한다. 이 곳을 가보아야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분단현실을 체감할 수 있게 될 것임”을 강조해왔다. 왜냐하면 이들 지역은 북한과 중국간의 긴 국경선을 사이에 둔 여러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북한’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의 각급 기관이나 기업소가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가 ‘북한 봉사원’과 대화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고,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보아왔던 음식과 공연”을 먹어보고 관람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들 지역에 가 보아야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등 ‘김씨일가’가 통치하고 있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代)를 이은 폭압독재정치의 실상을, 비록 편린(片鱗)이나마 접하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자긍심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무나도 극명(克明)하게 비교되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북한과 중국의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강 건너 등불’이라도 보며 한민족의 분단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평화통일’에의 소명의식을 가슴으로나마 간직할 수 있으리 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번 “북한식당 종업원의 집단탈북 및 군 고위인사의 대한민국 입국”이라는 사안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북한과 관련된 소식은 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왜냐하면 신년 벽두부터 날아든 북한의 ‘4차 핵실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자행된 장거리 미사일발사로 인해 전세계는 충격과 함께 경악을 금치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한동안 수면밑에 가라앉아 있던 “고 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한국의 재무장문제”가 가시화되고 있고, 유엔 차원에서의 고강도 대북제재논의와 함께 “개성공단 중단”이라는 조치도 취해지고 있어 가히 한반도는 ‘태풍의 눈과 같은 지역으로 주목을 받기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한반도의 정세가 북한의 무모하기 이를데 없는 ‘막가파식’ 도발행위로 일촉즉발의 긴장상황으로 치닫기 전인 지난해 말 중국의 ‘단둥’을 찾았다.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 대부분은 그 감회를 “무엇인가 가슴속이 꽉 막힌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는 말로 대신하였지만, 필자 역시 이곳을 다녀올 때마다 매번 이런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음은 같은 국적을 가진 국민으로서 ‘국가공동체의식’을 가져서 일까?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인구 80여만명의 ‘단동’과 10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신의주’의 겉모습이 너무나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보이는 압록강 건너편의 신의주 시내는 건물의 모습, 특히 거의 맨살을 다 드러낸 ‘민둥산’은 벌써 수십년째 기아(飢餓) 선상에서 허덕이는 북한의 경제난을 거의 그대로 투영(投影)하는 것 같았고, 강을 오가는 선박의 외형 역시 수십년간의 차이를 느끼게 할 만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압록강변에서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거나 ‘소라’(혹은 ‘다슬기’)를 채취하는 북한주민들의 모습,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무언가를 담은 배낭을 매고 힘겹게 걸어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마치도 ‘타임캡슐’을 타고 40–50년 전으로 되돌아 가 우리의 옛모습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였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압록강은 백두산을 발원지로 하여 780여km에 달하는데,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영하 30도를 웃도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초겨울에 입었을 것 같은 동복(冬服) 수준의 거무튀튀한 색상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었고, 부녀자들은 시골 냇가나 강가에서 우리네 여염집 여인들이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었다.

이런 차이는 야경(夜景)을 대비할 때 더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3일 동안 눈여겨 본 신의주지역에는 몇 곳(특히 김일성의 동상이 있는 곳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암흑천지여서 휘황찬란한 불꽃놀이를 하면서 음악에 맞춰 집단체조나 춤을 추는 ‘단동’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별천지로 보일 정도였다. 물론 필자가 작년 이맘때 쯤 찾았던 신의주지역의 풍경은, 압록강변에 정박한 선박이나 건물에 다소 환한 색의 페인트칠을 하거나 치장을 하였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단동의 그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음을 숨길 수 없는 맨살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으로 비쳐졌다.

일행 모두가 호기심 반, 놀라움 반으로 관광선에 오른 지 1시간여 우리 일행은 어느덧 한때 한반도내 최대 전력생산량를 자랑했던 수풍댐 인근에 도착하였다. 마침 강 건너 마을 뒷산에는 큼지막한 흰글씨로 쓰여진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만세”,“위대한 령도자 김정은동지 만세”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 왔으며, 우리 일행 중 한 명은 “무엇이 위대한지 정말 모르겠다”며 혀를 차기도 하였다. 필자는 농담 삼아 “주민들은 생활이 어려워도 지난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대처럼 굶어죽지 않게 하였으니 위대한 것이 아니냐”고 대꾸하였고, 아마도 이 때 우리 일행 모두는 가슴속 한편에 무언가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으리라 미루어 짐작을 하였다. 압록강에서 잡은 물고기와 산채, 닭고기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마친 일행은 ‘단동’으로의 회항 도중 곳곳에서 장총을 휴대한 채 주민들을 감시하는 국경경비대의 초병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앳되어 보이는 이들에게서 징집연령이 우리보다도 3–4살 아래의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눈매만큼은 살기(殺氣)가 어리는, ‘집단적 세뇌교육’의 효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아직까지도 “남조선의 동포들은 미제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가운데 허리에 깡통을 차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가련한 존재”로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곳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단동’은 천안함폭침사건으로 ‘5.24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만 하여도 3천여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대북사업차 체류하고 있었으나, 이후에는 거의 모두가 실업자(?)가 되어 귀국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현재는 500여명 정도만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압록강호텔에 ‘조선경제위원회 중국본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기관, 기업소 관계자들 4–5천여명이 단동에 들어와 중국의 동북 3성(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의 총괄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는 비자발급업무를 관장하는 외무성 관료와 해관원을 비롯한 외화벌이꾼도 상당수 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중국과의 IT 업무와 관련한 합작사업을 수행하는 기관, 기업소 관계자들의 수가 최근 급증하고 있으며, 이들 기관에 파견된 근로자의 수도 꾸준하게 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북한 근로자들의 월급은 대략 미화 200달러 수준인데, 이 중 70% 정도는 “충성자금, 애국자금, 군원호금 등”의 명목으로 북한당국이 착취하고, 나머지 30%도 “공정환율 : 미화 1달러당 1,000원 정도”로 환산하여 북한화폐로 주기 때문에 피땀 흘려 노동을 하여도 정작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옷이나 구두, 식료품 등 생필품 몇 가지뿐”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투숙한 호텔(라이프호텔 : 설립운영자는 조선족)은 단동 중심가에 위치하였는데, 교통이 편리하고 숙박료가 저렴하여 북한에서 물품조달을 위해 출장을 나온 관계자(주로 2인 1조)나 외화벌이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호텔 로비나 식당에서는 가슴에 초상휘장을 모신(※ 김일성–김정일뱃지를 부착한) 거무튀튀한 모습의 북한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은 “작년에는 얼굴이 거무스레 하고 배가 나온 중년층이 많았으나, 올해는 젊은 층이 많으며 의복도 남방셔츠에 검은 색 바지를 입어 준수해 보인다”고 나름대로 평가하였다.

이런 설명을 들어서인지 호텔에서 만난 북한사람을 나름대로 관찰해 보니, 우리가 영상으로만 보아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고, 특히 호텔밖에서의 흡연시나 식사할 때의 모습도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네까?”와 같이 응대하는 등 우리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조선사람’ 그대로 였다. 이런 북한사람들이 ‘김정은’이라는 30대 초반의 철부지 애송이 지도자의 일방적인 명령과 지시하에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며 가슴아픈 현실인가?

이런저런 상념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우리 일행은 중국–북한간 수출입 물류차량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단동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관 입구로부터 근 500m 줄지어 선 대형차량들 사이로 입북하는 관계자처럼 가장하고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세관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에는 이른바 ‘조국방문’을 위한 관광차량과 ‘휘파람’ 승용차(평화자동차가 생산한 차량이름), 그리고 철관, 철선, 식량(백색 및 연분홍색 포장으로 미루어 ‘양곡’으로 추정됨), 정화조, 섬유원단선 등을 가득 실은 20톤 이상의 대형트럭 등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통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세관 주변에는 북한과의 교역을 위한 각종 사업장(거래처)이 마치 ‘개미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한국말을 쓰는 조선족과 김일성뱃지를 단 인민복 차람의 북한사람이 무슨 상담을 하는 지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서로 감정을 삭히지 못하고 옥씨각씬하는 모습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동행한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단동세관을 통해 북한으로 ‘1일관광 : 08:00–17:00’을 가는 중국사람이 연 5만명을 넘고 있는데, 이들 관광객은 신의주에 있는 김일성동상을 참배하고 이어 신의주유치원 참관한 후 중식을 하는 등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들 관광객 중에는 남방지역에 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 중 일부는 관광을 통해 북한의 신의주지역에서 자신들이 “못살았던 과거를 다시 보는 듯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듯 외국인인 중국사람들은 일정액의 돈만 내면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땅을 오갈 수 있는데, ‘단군’의 같은 자손인 우리는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체제의 차이 때문에 ‘강 건너 등불’을 보는 것처럼 먼 발치서 북한땅과 사람들만을 보고 있으니, 새삼 냉엄한 분단현실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세관을 나온 우리 일행은 미리 마련된 버스편으로 중국당국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단동 신시가지에 건설된 중국과 북한간의 경제협력을 상징하는 ‘신압록강대교(정식 명칭은 ’중조신압록강대교‘)로 향하였다. 이 대교는 길이 3,030m, 왕복 4차로의 사장교로, 중국정부가 건설비 3,500여억원 전액을 부담하여 2010년 2월 25일 착공하여 4년만인 지난 해 10월 완공하였지만, 이로부터 9개월이 지나도록 실제 개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이 대교의 북한쪽 끝에 있는 평양–신의주를 잇는 ’국도 1호선‘과 연결되어야 하나 그 연결공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국경검문소나 세관–통신시설 등 기반시설조차 건설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북한이 친중파인 장성택 처형 이후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사를 중단, 중국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으며, 교역량의 90%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중국이 최근 ‘북핵’ 등 현안문제에 대해 반기(反旗)를 드는 등 반북성향에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그 이유야 어찌 되었건 “앓는 것보다 얻을 것이 훨씬 많을” 이대교공사의 마무리를 애써 미루거나 연기하고 있는 북한당국의 처사는 남북교류–협력에 있어서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나 변명”을 대면서 어깃장을 놓거나 이행–실천을 미루고 있는 사례를 보는 것 같았다. 기실 북한당국은 그동안 이루어진 각종 남북교류협력사업, 그 중에서도 금강산관광사업이나 개성공단 운영 등에서도 “관광객을 피격 사망케 하거나 천안함을 폭침시켜 5.24조치를 발동하게 하고 개성공단 근로자의 임금을 주권(입법)사항이라면서 일방적으로 인상하는 등” 다분히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행태를 나타내고 있어 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있는 우리 일행이 발길을 옮긴 곳은 여의도의 1.5배 크기를 자랑하는 ‘황금평지대’였다. 이 곳 역시 장성택이 생존해 있을 당시만 하여도 중–북관계의 비약적 발전을 상징하는 곳이었으나,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북한초병만이 단순히 경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작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지역 중간쯤에 10여층으로 한창 축조되고 있는 관리사무동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뒤늦게나마 이 지역개발이 결코 적지 않은 현실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을 깨달은 북한당국이 종전의 소극적 입장과 자세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았다.

또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꼼꼼하게 이중으로 쳐진 철책과 감시카메라 는 지난 봄 이 지역에서 근무하던 북한군이 월경하여 중국사람을 살해한 것을 의식하여 중국당국이 추가로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이런 중–북 합작지역을 오가면서 우리 일행은 등소평 이래‘흑묘론 백묘론’을 앞세우는 가운데 개혁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오늘날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우리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반제반미주의를 역설하고 있는 북한의 현실이 얼마나 대조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국가를 구별하는 경계선 사이로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노력동원효과를 거양하기 위해 인민반, 작업반별로 붉은 기를 내걸고 모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은 외형상 비슷해 보였지만 중국의 경우는 이앙기나 트랙터를 탄 농민이 혼자서 넓디 넓은 논에서 작업을 하는 데 비해 북한에서는 올망졸망 줄을 이어 양식을 나르는 개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일일이 모를 심고 있는 모습,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논을 갈고 있는 모습 등은 이들의 경제력 격차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하였다.

일행 모두가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중국과 북한, 더욱이 지난 60년대까지만 하여도 ‘한 수 위’에 있던 북한의 경제력이 “어쩌면 이렇게도 정반대로 역전될 수 있을까” 하는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인 ‘능라도’에 도착하였다. 분단현실과 중–북간의 경제력 차이 등을 눈으로 직접 목도한 우리 일행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이런 많은 생각을 한 탓인지 거의 모두가 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때마침 나온 음식들이 그렇게 꿀맛처럼 구미를 당겼다. 바로 어제 식사를 했던 ‘고려식당’처럼 새롭게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단동내 10여개의 북한 직영식당 가운데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이곳에서 역시 식사 이후 기타와 북 등과 함께 북한 접대원들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진찍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너무도 자유로웠다. ‘이윤미’(25세)라는 표찰을 단 접대원은 3년이라는 이국(異國) 생활에 익숙해져서 인지 우리 일행이 묻는 말에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으며 매우 다정스럽고도 상냥하게 응대해 주었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진도 함께 찍고 노래도 함께 부르는 등 이제껏 접해왔던 ‘북한 접대원’과는 사뭇 다르게 행동하였다. 이런 모습에 호감을 느껴서인지 동행한 한 일행은 300위 안이라는 거금(?) 을 들여 북한술을 주문하였고, 이루 일행은 이를 기화로 목청껏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합창하기도 하였다.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뗀 후 숙소로 돌아와 필자는 오늘 하루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멀고도 가까운 북한땅”을 언제쯤 자유롭게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상념을 떠올리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순간순간 뇌리를 스친 수많은 상념과 단상(斷想)들을 돌이켜 볼 때, 다른 어떤 여정보다 보람있고 가치있는, 그런 소중한 경험이었다. 배에서 북한경비병에게 던져준 ‘담배 한 대기(10갑)’에 얽힌 이야기, 집단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북한사람들의 행태, 거리거미마다에서 팔리고 있는 북한산 담배와 우표, 지폐 등은 한국내에서는 결코 쉽게 목도하거나 구매할 수 없는 단동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이었다.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일 좋아’라고 노래를 하고 있는 북한이지만 마치 동물원에 갇혀있는 원숭이에게 소시지를 던져주듯이 건네는 담배, 행여 대오(隊伍)의 일탈이 있을새라 물품을 구입시에도 항상 집단으로 다녀야만 하는 상호 감시통제체제의 발동, 거의 전부가 고급 인쇄기로 찍어낸 가짜 담배와 우표, 지폐를 ‘진짜’로 착각하여 호기심으로 사는 관광객들...이런 모든 것들은 오로지 중국과 접경지대에 있는 곳인 단동(물론 ‘도문’의 경우도 해당되겠지만)에서만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진풍경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필자 역시 이번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가슴속 저변에 무언가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과 이를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난의 천리를 가면 행복의 만리가 온다”라고 주민들을 기만하고 있는 북한정권,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고 낙관적 신심만을 불어 넣은 채 인민을 우롱하고 있는 김정은정권, 그 끝은 언제가 될 것인가?

다음호에는 “중국 ‘단둥땅’에서 바라본 북한 답사기 2를 연재 하겠습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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