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는 유일무이한 장르…눈물과 웃음의 한바탕"

머니투데이 김유진 기자 2016.04.2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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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현장을 가다] <3-1> 성창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인터뷰

편집자주 일상에 흩뿌려진 삶의 방식들이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면 '유산'이 됩니다. 무형문화유산은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즉 형태가 없는 유산이지요. 눈으로만 봐야 하는 유형유산과 달리, 무형유산은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을 다 사용해야만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답니다. 그만큼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접하기 어렵지만 진짜 우리의 문화, 즉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 전해져 온 오랜 이야기는 유형유산보다는 무형유산에 훨씬 더 짙게 배어있습니다. 두 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축된 이야기가 담긴 삶의 터전을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성창순(83) 보유자. 그는 지난 1991년 보유자에 오른 뒤 지금은 국내 최고의 심청가 명창이 됐다. /사진=김휘선 인턴기자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성창순(83) 보유자. 그는 지난 1991년 보유자에 오른 뒤 지금은 국내 최고의 심청가 명창이 됐다. /사진=김휘선 인턴기자


처음 무대에 서던 날. 아버지는 손바닥에 껌 한 통을 쥐어주었다. 소리꾼 아버지에게 소리꾼 딸이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이었다.

"아버지가 소리하는 걸 많이 반대하셨지. 잘하면 명창이요, 못 하면 기생 광대밖에 더 되겠느냐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아시니까. 그런데 무대를 보시고 나더니, 반대를 접으시더라고."



그렇게 음악을 시작한 어린 소리꾼의 딸은 커서 국내 최고의 명창이 됐다. 지금은 국내 5명밖에 없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성창순 명창(82)의 이야기다. 지난 1991년 보유자가 된 뒤, 지금은 국립극장 최고의 인기 공연이 된 '완창 판소리'의 문을 여는 등 국내 최고의 국악인 자리에 올랐다.

전남 광주의 소리꾼 마을에서 태어난 성 명창은 어릴 적부터 소리를 동요처럼 읊고 자랐다. 일상이었기에 좋은 줄도, 나쁜 줄도 모르고 소리를 익혔지만, 아버지인 성원목 명창은 소리를 따라하는 어린 딸을 나무랐다. 반면 어머니는 어린 딸의 재능을 알아봤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응원했지. 몰래 소리 배우는 선생님을 알아보시기도 하고."



어머니 덕분에 16세에 공기남 명창을 만나 단가 하나와 '심청가'를 사사 받으며 소리꾼의 삶에 입문한 성 명창은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조선창극단'에 들어가서는 20대의 창창한 나이의 선배들을 뒤로하고 먼저 무대에 설 정도였다.



"돌아보면 참 복 받은 삶이었어. 아버지 걱정대로 그냥 시덥잖은 삶을 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잖아. 그런데 박록주, 김소희 명창처럼 훌륭한 스승들에게 사사 받고 멋지게 기량을 펼치며 살 수 있었지. 예술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

그는 스승인 박녹주 명창을 등에 업고 산을 올라 경기 안양시 삼막사에 들어간 뒤 100일 동안의 소리 공부를 하기도 했다. 녹음기도 없던 시절, 스승이 '흥보가' 한마디를 부르면 그대로 따라 하며 몇 시간 짜리 소리를 통째로 익혔다.


그러자 스승은 "너는 소리 도둑년이여"라고 말을 했다. 소리꾼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칭찬이었다. "그렇게 진짜 소리꾼 인생이 시작됐지. 소리의 즉흥성 때문에 기록도 할 수 없고 그때그때 다른, 그 몇 시간 짜리 바디를 그대로 몸으로 익히면서 소리꾼이 되는 거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성창순(83) 명창. 성 명창은 "판소리는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인턴기자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성창순(83) 명창. 성 명창은 "판소리는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인턴기자
다행히도 성 명창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시절, 판소리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75년에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순회공연을 열었고, 일본 공연도 자주 갔다. 판소리 같은 장르가 없는 해외에서 그의 공연은 언제나 기립박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내가 소리하는 것을 반대했던 오빠도, 요새는 '너가 가장 똑똑했다'고 말해. 판소리는 정말 특별한 장르야. 전 세계에 이런 종합 예술이 없어. 눈물과 웃음이 다 들어있는, 이런 예술이 어디있어."

최근 송소희 등 어린 소리꾼들이 TV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영화 '도리화가'를 통해 배우 수지가 판소리를 알리는 등 인기를 끄는 것이 흐뭇하다고 송 명창은 말했다. 다만, 소리에 대한 열정을 제1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애정어린 조언을 남겼다.

"요새 활동하는 어리고 예쁜 친구들한테 '소리는 언제하니' 라고 했더니 샐쭉 웃더라고. 진정한 소리꾼이라면 소리 외적인 활동보다는 소리에 가장 진지하게 임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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