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이 남긴 '인간계좌들'…박학기라는 '계좌관리자'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6.04.09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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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9년째 ‘김광석 다시부르기’ 성공 이끈 박학기…가수 넘어 숨은 경영자 마인드

- “‘소중한 일’부터 하고 ‘인생 계좌’ 틀어야”

김광석이 남긴 '인간계좌들'…박학기라는 '계좌관리자'


2008년부터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로 고 김광석은 다시 태어났다. 이 무대는 그를 기리는 선·후배 뮤지션들이 총출동해 그의 음악을 전파하고, 그 뜻을 되새겼다. 유리상자, 나무자전거, 동물원 등이 지금까지 김광석과 함께 해온 동료 뮤지션들이다.

이 무대가 9년째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김광석의 친구 박학기를 빼놓고 설명하긴 힘들다. 박학기는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를 시작하면서 거의 10년간 이 무대가 이어질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열기는 식지 않았다.



무대의 지속성은 박학기를 향한 동료 뮤지션의 철저한 신뢰 덕분이다. 박학기가 꾸리는 기획은 ‘언제나 옳다’는 신뢰가 기반이 된 셈이다.

“광석이가 생전에 제게 가르쳐 준 유일한 교훈 아닌 교훈은 ‘인간 계좌’를 트는 것이었어요. 광석이가 직장인처럼 매일 노래 부르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쌓은 건 통장이 없는 인간 계좌였죠. 제가 당장 지인에게 1억 원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줄 능력이 없어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게 인간 계좌의 본질인데, 제 인생의 좌표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작용했어요. 이 추모 콘서트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추모콘서트를 통해 번 수익은 600만 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3억 7000만 원으로 늘었다. 무형으로 쌓은 인간 계좌가 유형의 통장 실적으로 이어지면서 이 공연은 점점 활기를 띠었다.

전국 투어를 돌고 올해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곳은 오는 5월 7일 서울 경희대 평화의 전당이다. 3000석을 수용하는 이곳에 기존 뮤지션들뿐 아니라 윤도현, 이적 등이 추가로 참여한다. 인간 계좌가 만들어낸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5월 7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서 김광석 추모콘서트…윤도현·이적 등 뮤지션 다수 참여


가수 박학기는 가슴을 울리는 선율을 만드는데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지만, 예술인이라기보다 경영자에 가까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바쁜 일보다 소중한 일을, 통장 잔고보다 인생 계좌를 트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게 그의 인생 철학이다. /사진제공=HK Ent<br>
가수 박학기는 가슴을 울리는 선율을 만드는데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지만, 예술인이라기보다 경영자에 가까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바쁜 일보다 소중한 일을, 통장 잔고보다 인생 계좌를 트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게 그의 인생 철학이다. /사진제공=HK Ent
박학기는 ‘아름다운 세상’ ‘비타민’ 등의 곡을 만든 가수로 유명하지만 독특한 그의 삶이 실은 더 주목받고 있다. 대중 예술인이 흔히 사는 자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 예술인은 현실 논리에 강한 경영 철학과 반대되는 삶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철저히 효율성을 강조한 경영 논리에 자신의 삶을 맞춘다.

그가 불안한 삶의 해결책으로 가장 먼저 찾는 멘토가 검사 출신의 법조인인 그의 친형이다. “형, 가슴이 답답해”라고 물으면, 형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교보문고에 가, 거기에 답이 있다.” 서점에서 그가 얻는 지혜는 김광석 다음으로 얻는 삶의 지지대다. 탈무드도 그중 하나.

“탈무드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무위도식하는 한량한 아버지 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아버지처럼 놈팡이로 살고, 동생은 아버지와 정반대로 악착같이 살거든요. 제 아버지도 그랬어요. 별일 없이 한량처럼 사셨거든요. 그땐 탈무드의 형이 될 것인가, 동생이 될 것인가 고민이 많았는데, 책이 결과적으로 반면교사의 기회를 줬어요.”

가수 박학기(오른쪽)와 두딸 승연(왼쪽),정연.가수 박학기(오른쪽)와 두딸 승연(왼쪽),정연.
새벽에 주로 작업하고, 오전을 수면 시간으로 삼는 뮤지션의 일반적인 ‘특권’도 그는 포기했다. 회사원처럼 아무리 늦게 자도 오전 8시엔 반드시 일어나 두 딸의 등교를 책임졌다. 성인이 된 두 딸 승연(23·동국대 조소과 휴학)·정연(19·한양대 연극영화과)이 여전히 볼에 입맞춤하며 아빠 사랑을 외치는 데에는 그의 극진한 정성이 한몫한 셈이다.

낭만? '효율적 경영' 마인드…탁월한 문화기획자 자리매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을 또 소개할 필요가 있겠네요. 사람들은 늘 바쁜 일과 소중한 일의 두 극점에서 선택을 강요받기 마련이에요. 책처럼 저도 소중한 일을 먼저 선택하죠. 김광석 추모 무대를 꾸리는 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이나, 바쁜 일과 소중한 일이 겹쳤을 때 바쁜 일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나 모두 우선순위를 고려한 선택이었어요. 오늘 이 만남도 바쁜 일보다 소중한 일이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에요. 하하.”

좋고 효율적인 것은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그는 연예인 최초로 한국 리더스클럽이 주최한 리더십센터 강좌 68기로 들어가 경영자 수업을 듣기도 했다. 영양가 있는 삶, 도태되지 않고 발전하는 삶, 더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경영하기 위해 연예인이 아닌 기획자 마인드로 체질을 개선한 것이다.

그런 경영자 마인드로 손댄 여러 기획 아이템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불러일으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인 서원밸리 그린콘서트. 2000년부터 15년째 이어온 이 무대는 이름도 낯선, 골프장에서 여는 이색 공연인데도, 연인원 6만 명이 다녀갈 만큼 인기 많은 페스티벌로 성장했다.

올해 9년째 이어온 '김광석 다시 부르기'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 그는 친구 고 김광석으로부터 배운 '인생 계좌론'을 통해 동료 뮤지션들을 끌어들여 이 무대를 성장시켰다. 공연은 오는 5월7일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다. /사진제공=HK E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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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년째 이어온 '김광석 다시 부르기'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 그는 친구 고 김광석으로부터 배운 '인생 계좌론'을 통해 동료 뮤지션들을 끌어들여 이 무대를 성장시켰다. 공연은 오는 5월7일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다. /사진제공=HK Ent

이 공연에는 인기스타 아이유, 2PM 등 내로라하는 인기 아이돌 그룹들이 수시로 다녀간다. 비결은 박학기의 ‘경영능력’. 그는 스타들을 움직이는 매니저 수뇌부를 설득해 스타들을 무대로 불러내고,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단점에도 골프라는 레저와 음악이라는 문화로 마케팅 전략을 펼쳐 관객을 동원한다. 이 때문에 현장에선 그를 가수보다 탁월한 기획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는 그렇게 경영 성과를 내고도 앞으로 드러내지 않고, 뒤로 숨는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그가 기획과 경영에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식 경영은 어떨까. 두 딸은 현재 모두 아이돌 그룹 멤버다. 승연은 최근 마틸다라는 4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했고, 정연은 SM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두 딸의 걸그룹 데뷔를 왜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간 계좌를 통한 기획은 좀 하는데, 무엇을 자랑하듯 내놓는 홍보에는 쥐약”이라며 “드러내지 않고도 성공하는 걸 보는 게 더 즐겁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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