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신하를 임용하는 도에 대해 '주역(周易)'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어진 이'는 덕과 재능을 두루 갖춘 인재를 뜻한다. 성리학에서 임금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어진 이를 구해서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은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나라가 안정된 후에는 그 사람의 덕을 중시하지만 기틀을 다지기 전에는 재능이 우선시된다. 건국 초기에 임금이 된 세종대왕은 그래서 능력 위주의 용인술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장영실'에서도 신분의 벽을 깬 주인공의 입지전 못지 않게 그것을 가능케 한 세종의 용인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장영실의 부계 혈통은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기술관 집안이다. 비록 어머니가 관기였기 때문에 관노의 굴레에 갇혔지만 장영실의 기술적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이에 힘입어 장영실은 태종 재위기에 궁궐로 들어간다. 그를 알아본 세종은 파격적으로 밀어줬다.
이처럼 세종은 인재를 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능력을 길러서 썼다. 어찌 보면 앞서 언급한 주역의 도를 누구보다 충실하게 실천한 임금이었다. '세종실록' 1426년 12월 11일자를 보면 그 단서가 나온다. 그날 세종은 집현전의 젊은 신하들을 불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했다. 특별휴가를 주어 집에서 책을 읽게 한 것이다. 그 취지와 방법을 세종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종은 젊은 신하들에게 장래를 위해 독서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직무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고 하니 아예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책을 읽으라고 했다. 그 목적은 그들을 쓸모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단, 특별휴가를 주면서 자신의 뜻에 맞는 성과, 즉 목표치도 제시했다. 또 독서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도교사까지 붙였다. 세종이 어떻게 인재를 길렀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학문적 식견이 뛰어난 임금이 이렇게 나오니 신하들도 늘 긴장하며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쓸모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신하들도 부지런히 자신의 쓸모를 개발했다. 세종의 용인술은 백성이 편리하고 넉넉하게 사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지향했다. 한글, 천문역법, 농사법, 의약학 등 눈부신 업적들이 그의 치세에 쏟아져나왔다. 인재를 길러 만민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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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능력을 우선시하고 인재를 길러서 쓴 세종의 용인술은 아쉽게도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16세기 이후 신분질서가 공고해지며 조선은 양반 외에는 뜻을 펼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어진 이의 기준도 능력보다 덕에 치우쳤는데 그런 인물들은 현실과 동떨어지기 일쑤였다. 고상하지만 허황된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나라가 당쟁과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 말로 '금수저'와 '흙수저'를 차별한 결과다. 오죽 하면 조선 중기의 개혁정치가 조광조가 이렇게 탄식했을까?
"조선은 땅덩어리가 작아 인물이 적은데다 또 서얼과 노비를 분별하여 쓰지 않습니다. 중원에서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쓰지 못함을 걱정하거늘 하물며 작은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중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