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도 집회신고 해야 하나요?

머니투데이 이재윤 기자 2016.02.28 07:00
글자크기

[취재여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북측에서 홀로그램 영상을 활용한 유령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북측에서 홀로그램 영상을 활용한 유령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


지난 24일 저녁 이른바 '유령시위대' 120여명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 나타났습니다. '외교 공관 인근', '교통 혼잡 유발' 등의 갖가지 이유로 사실상 집회가 불가능한 광화문 광장에서 유령들은 경찰을 피해 대형 스크린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국제앰네스티가 세계에서 두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시도한 '홀로그램 시위'였습니다.

집회 관리를 맡은 경찰도 1시간 남짓 이어진 유령시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초 '문화제'로 신고됐지만 '미신고 집회'로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수십여 명의 정·사복 경찰과 소음측정 차량이 출동했고, 이상원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직접 현장을 찾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문제 없었다"는 판단을 앰네스티에 전했습니다. 그러나 향후 유사 형태의 시위에 경찰이 같은 대응을 할지는 미지수입니다.



◇홀로그램 시위도 집회신고 대상?…경찰 "검토중"=경찰은 홀로그램 시위를 앞두고 "구호를 제창하는 등 집단 의사를 표현하면 문화제가 아닌 집회·시위에 해당하며, 이럴 경우 불법 예방 차원에서 강경 대응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등의 미리 녹음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구호를 제창한 것으로 보기 어렵고, 소음기준(65db)도 넘지 않았으며, 교통방해·폭력 등의 기타 불법행위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경찰의 '가이드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것일 뿐입니다. 바꿔 말하면 홀로그램 시위라도 '구호 제창', '소음기준' 등의 기준을 위반하면 언제든 '집회'로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찰은 또 앞으로 유사한 형태의 시위를 집회 신고 대상에 포함시킬지 법률 검토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 사례와 전문가 의견 등을 통해 앞으로 영상 집회를 단순히 문화제로 봐야 할지, 아니면 신고 대상으로 넣어야 할지 논의 중"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번의 유령 시위를 낙관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사망 여중생 추모집회 이후 대표적인 평화시위 문화로 자리잡은 촛불집회./사진=머니투데이DB2002년 미군 장갑차 사망 여중생 추모집회 이후 대표적인 평화시위 문화로 자리잡은 촛불집회./사진=머니투데이DB
◇'촛불시위'도 수사했던 경찰…대법원 "평화적 시위문화 기여" 평가=경찰은 지난 2002년에도 새로운 형태의 집회를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미군 장갑차 사고로 사망한 여중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촛불집회'가 시작됐습니다. 초기 참가자들은 일몰 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0조(2009년 9월 헌법불합치 결정) 위반 등을 이유로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문화제로 신고했지만 구호를 제창했다는 판단 역시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화염병과 쇠파이프, 최루탄과 백골단으로 점철됐던 한국의 전근대적 시위를 평화·비폭력 문화로 전환시킨 대표적 계기로 꼽힙니다. 2002년 당시 미 대사관 앞을 지나 광화문까지 수십만명의 군중이 들어찼지만 경찰력과 시위대간 폭력도 최소화됐습니다.


실제로 2005년 대법원은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주최측에 대해 집시법 위반 혐의를 인정,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도 "평화적 시위문화 정착에 기여했다"고 판시했습니다. 충돌보다는 평화의 길을 택한 새로운 유형의 시위가 한국 사회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한 셈입니다.

◇'구호제창·소음기준' 획일적 기준 언제까지=홀로그램 시위마저 관리·처벌의 틀 안에 넣으려는 경찰의 경직된 사고가 안타깝습니다. 집회·시위는 앞으로 홀로그램을 넘어 더욱 기발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경찰은 '구호를 제창했느냐', '소음 기준을 초과했느냐' 등의 획일적 기준을 들이대며 '법률적 검토'를 되풀이 해야 할까요.

앰네스티는 '2015/16연례보고서'에서 "한국의 집회·시위 자유가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했습고, 올해 초 정부 초청으로 방한한 마이나 키아이 유엔특별보고관도 "수년간 한국의 평화로운 집회·시위의 자유가 후퇴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같은 환경도 새로운 집회·시위의 끊없는 탄생에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준법'과 함께 '평화'를 집회 관리의 핵심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집회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길 바라는 이유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