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재벌 2세 꿈꾼 이방원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5.12.12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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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34 - 이방원 : ‘닮은꼴’ 두 태종의 야망과 패륜

‘조선판’ 재벌 2세 꿈꾼 이방원


한 초등학생이 선생님에게 꿈 때문에 고민이라며 상담을 청했다. 초등학생의 꿈은, 재벌 2세란다. 선생님은 그럼 고민이 뭐냐고 묻는다. 아이 왈,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

아마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사실 재벌 2세를 꿈꾸는 초등학생 이야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종종 기사로 접해왔다. 장래희망을 조사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재벌 2세를 꼽더라는 것. 아이가 재벌 2세가 되려면 아빠가 재벌이어야 한다. 아빠 입장에서는 마냥 웃어넘길 수 없다. 우스개 속에 씁쓸한 현실이 어른거린다. 그것은 평범한 아빠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꿈꾼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역사인물 가운데는 오늘날로 치면 재벌 2세를 꿈꾸고, 이를 위해 아빠를 재벌로 만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요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주가를 올리는 태종 이방원이다. 그는 정몽주를 제거하고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았다. 이성계는 다섯째 아들에게 개국의 결정적 공을 빚졌다. 극중 이방원 역을 맡고 있는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보여준 재벌 2세와는 또 다르다. 태종은 ‘조선판’ 재벌 2세이자 사실상 공동창업자였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이 추구한 재상 정치를 무너뜨리고 군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먼저 육조로 하여금 행정 실무를 분담케 해 국정 운영의 축으로 삼았다. 지방 행정구역도 새로 정비하고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또한 전국적인 토지조사와 호구조사를 실시해 세금을 거두기 위한 근거로 이용했다. 16세 이상 남자들에게 신분증명서인 호패를 소지하도록 한 것도 이 때였다. 게다가 공신과 외척 등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누구를 막론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은 점차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나갔다.



이렇게 자식으로서 아비를 권좌에 올리고, 마침내 일국의 공동창업자로 나선 이방원의 행적은 동아시아의 또 다른 태종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며 정관(貞觀)의 치(治)로 유명한 당태종 이세민이다. 그는 수나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기에 서북지역 군벌인 아버지 이연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켰다. 이후 부자의 군대는 천하를 평정하기 위하여 여섯 차례의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중 네 차례를 승리로 이끈 장수가 이세민이었다. 부황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 하늘이 내린 장수)’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전공이 컸다.

황제가 된 당태종은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정치를 펴는데 이를 두고 그의 연호를 따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다. 이세민은 문벌이 떨어져도 실력이 뛰어난 인재를 두루 등용했다. 위징, 방현령, 두여회, 장손무기, 위지경덕 등이 당태종의 치세에 활약한 신하들이었다. 특히 위징은 한때 반대편에 서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지만 과감하게 기용하고 비판을 받아들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세민은 3성6부(중앙관제), 율령격식(법체계), 균전제와 조용조(조세제도), 부병제(군사제도) 등 내치를 확립하고 고구려를 제외한 주변의 이민족을 제압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드리우는 법이다. 이방원과 이세민은 둘 다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고 새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는 공적을 남겼지만 후세의 사가들에게 좋은 왕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천륜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배다른 형제인 세자 방석 등을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끄집어 내렸다. 이세민 역시 626년 현무문의 변을 꾸며 적장자인 태자 건성과 아우 원길을 살육하고 부황 이연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탈했다. 용서받지 못할 ‘닮은꼴’ 패륜이다.


오늘날 재벌가에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는 진리를 재확인하게 된다. 재벌 2세를 꿈꾸는 아이 덕분에 어쩌면 재벌이 될 지도 모를 아빠라면 이거 하나는 유념해 두자. 권력은 부모자식과 형제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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