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건 수험서·우유…생계형 절도 내몰린 '2070'

머니투데이 신희은 기자 2015.11.3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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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 위원회가 구한 사람들-①]시범운영 경미범죄 심사위원회, 10~20대·60대 이상 감경률 '최고'

편집자주 경찰청은 올 3~10월 경미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없는 피의자를 구제하기 위한 '한국판 장발장 위원회', 경미범죄 심사위원회를 시범 운영했다. 심사위를 통해 전국 600여명의 사람들이 처벌을 감경 받고 전과자로 전락할 위기를 면했다. 특히 취업난과 노후 불안에 시달리는 10~20대와 60대 이상의 감경율이 눈에 띄게 높았다. 이들의 사연을 들여다보고, 심사위가 범죄에 대한 '처벌' 일변도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훔친 건 수험서·우유…생계형 절도 내몰린 '2070'


# 지난 9월초 천안에 사는 이모양(20·여)은 시내의 한 서점에서 5만5000원 상당의 '전산세무2급' 책을 훔쳤다. 떨어져 지내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용돈으로 생활하던 이양은 세무공무원 시험 준비에 필요한 책을 살 여력이 되지 않아 직원이 한 눈 파는 사이 책을 가방에 넣었다. 서점 직원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CC(폐쇄회로)TV 영상을 통해 이양이 며칠 전인 8월말에도 같은 곳에서 책을 훔친 사실을 확인했다. 그 책 역시 3만원 상당의 '전산회계' 책이었다. 이양은 범죄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훔친 책 두 권을 서점에 돌려줬다.

이양은 절도나 다른 범죄 전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형사입건돼 검찰로 송치되면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해도 전과가 남게 될 처지였다. 세무공무원을 꿈꾸던 이양에겐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서점은 이양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 처벌을 원치 않았다. 경찰도 이를 감안해 사건을 경미범죄 심사위원회에 회부, 심사위원 7명 만장일치로 즉결심판에 넘겼다. 이양은 판사 앞에서 거듭 용서를 빌었고 벌금 5만원으로 처분이 감경됐다.



# 지난 9월 중순 강릉에 사는 최모씨(75·여)는 읍내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면서 진열대에 놓인 2500원 상당의 1리터짜리 우유 1개를 집어들었다. 최씨는 직원이 다른 물건을 계산하는 사이 몰래 계산대에서 우유를 빼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가 들켜 경찰이 출동했다. 최씨는 귀가 어둡고 말도 어눌한 데다 거동도 불편했다. 자식의 보살핌 없이 홀로 살고 있었고 끼니도 주로 인근 급식소에서 해결하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다. 과거 췌장암을 앓은 적도 있어 자극적인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대신 우유를 좋아한다고 했다.

최씨가 고령인데다 피해품을 돌려받은 마트는 처벌을 원치 않았다. 경찰은 최씨 사건을 경미범죄 심사위원회에 회부해 심사의견 6명 전원 처분 감경 의견으로 최씨를 훈방 조치했다. 즉결심판으로 넘겨 벌금형이 나오더라도 어려운 형편인 최씨에겐 큰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최씨는 어눌한 말투로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훔친 건 수험서·우유…생계형 절도 내몰린 '2070'
경찰이 올해 시범운영한 경미범죄 심사위원회 제도를 통해 처벌을 감경한 비율이 10~20대 젊은층과 60~80대 고령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 것으로 분석됐다. 경제난이 장기화되면서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층과 퇴직 후 노후 불안에 시달리는 고령층이 생계형 절도 등 가벼운 범죄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9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3월23일부터 10월 말까지 8개월여 기간 동안 전국 17개 경찰서에 108차례의 경미범죄 심사위원회가 열렸으며, 총 702명의 심사 대상 중 612명(87.2%)가 감경 처분을 받았다. 612명은 대부분 초범에 딱한 사정을 고려해 피해자 등이 처벌을 원치 않았던 사례들이었다.

경미범죄 심사위는 생활고 등에 시달려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전과자로 만들기 전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올해 첫 시범운영된 제도로 일명 '한국판 장발장 위원회'로 불린다.


올해 3~10월 경찰은 전국 17개 경찰서를 상대로 경미범죄 심사위원회를 운영해 총 612명을 감경 처분했다. 사진은 천안 동남경찰서에서 심사위를 진행 중인 모습. /사진제공=경찰청. 올해 3~10월 경찰은 전국 17개 경찰서를 상대로 경미범죄 심사위원회를 운영해 총 612명을 감경 처분했다. 사진은 천안 동남경찰서에서 심사위를 진행 중인 모습. /사진제공=경찰청.
특히 경찰이 612명의 연령별 감경 비율을 분석한 결과 70대가 심사위에 회부된 55건 전체(100%)에서 감경 처분이 내려졌고 10대 역시 98.9%(87건 회부)로 뒤를 잇는 등 젊은층과 고령층의 감경률이 가장 높았다. 이어 △80대 91.7%(12건 회부) △60대 88.8%(80건 회부) △20대 84%(100건 회부) 순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관계자는 "아무래도 젊은층과 고령층이 경제난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라는 점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며 "10~20대의 경우 한 순간의 실수로 전과자가 되면 취업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60대 이상도 고령의 나이에 '전과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 처분 감경도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생계형 절도에 쉽게 노출되는 취약계층을 구제할 수 있는 심사위를 내년부터 확대 운영할 계획이다. 범죄의 수위에 대한 고려없이 형사입건하고 처벌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오히려 불필요한 전과자를 양산하고 재범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경찰 관계자는 "경미한 생계형 범죄의 경우 벌금형에 그친다 하더라도 형편이 어려워 벌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잖다"며 "한 순간의 충동적인 범행으로 전과자로 전락해 생계를 또 다시 위협받지 않도록 선처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제도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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