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학에 붙은 기업의 채용 현수막. / 사진=뉴스1
5년제 건축대학을 졸업한 A씨(여)는 2009년 'B건축사 사무소'의 합격 소식을 전해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50여년전 설립된 B사무소는 이후 1000여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한국 현대 건축의 산실'로 불리는 꿈의 사무소였다. 입사는 5년간 작업실에서의 쪽잠과 밤샘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A씨의 꿈은 연봉계약 때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1개월의 사내 교육이 끝날 무렵 연봉계약서에는 A씨 소속이 '㈜B도시'로 기재돼 있었다. 반면 기존 B사무소의 직원들은 '㈜B건축' 소속이었다. 이에 대해 사측은 "우리는 다 같은 B사무소 소속이지만, 조직이 커지고 인력이 늘어나면서 신입사원들을 B도시 소속으로 배정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실제 B건축과 B도시 직원들은 한 곳에서 일했고, 작업 역시 회사의 구분이 없었다.
B건축은 지난 2월 회생절차를 통해 정상화됐지만 B도시는 4월 끝내 파산 선고를 받았다. 사측은 "B도시가 파산해 법적으로 급여를 줄 의무가 없다"고 했다. 결국 B사무소의 한 지붕 아래서 일했던 직원들 중 B도시 소속으로 일했던 직원 29명은 회사를 상대로 임금청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청년 건축가들 "하루 근로시간 19시간…교통비·주말수당은 '남의 얘기' = A씨를 포함한 옛 B도시 소속 직원들의 소송에 대해 B건축 관계자는 "B도시는 B건축과 다른 회사로 과거 관계사 중 하나일 뿐"이라며 "B건축이 회생을 하니 B도시 소속 직원들이 뒤늦게 문제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B건축은 법정에서도 "바쁠 때만 B도시 건축가들을 끌어다 썼다"며 '동일한 공간에서 사실상 공동의 업무를 진행했다'는 B도시 직원들의 주장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년 건축가들의 열악한 사정은 비단 경영난에 빠진 B사무소만의 일은 아니다. 한 대형설계사무소는 한달에 평균 2.75건에 달하는 프로젝트를 마감하면서 프로젝트 1개당 평균 10일간, 하루 평균 19시간의 강도 높은 업무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무소에 근무했던 C씨는 "그럼에도 초과근무수당은 3000원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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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교통비를 주지 않거나, 월급에서 떼는 사무소도 부지기수였다. 대형설계사무소에서 일했던 D씨는 "야근비는 최대 25만원인데, 택시비가 하루 2만원씩 들어가니 항상 적자"라며 "주말에 고작 2만원을 주면서도 회사는 '건축가들이 돈 보고 일하나'며 당연한 듯 대했다"고 전했다. 건축가 E씨는 "대중교통이 끊길 때까지 줄야근을 하면서 택시비를 회사 경비로 결제했는데 월급서 제외됐다"며 "찍힐까봐 항의조차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규모가 작은 설계사무소를 지칭하는 일명 '아뜰리에' 건축가들은 더 열악한 상황이다. F씨는 "초과근무수당이나 근로자의 날 휴무는 그림의 떡"이라며 "월급이나 제 때 나왔으면 좋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여름과 겨울 휴가 합쳐서 공식 휴가는 5일인데 이마저도 이틀 이상 붙여가는 경우는 없다"고 아쉬워했다.
◇건축업계 '부침' 속 노동 약자 '속출'…"도제식 환경에 반발 어려워"= 청년 건축가들이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노동 약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건축업계가 부침을 겪으면서 정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데도 비좁은 채용 문 탓에 부당한 대우를 그저 버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
김은정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간사는 "건축업계는 이직할 회사가 한정돼 있고, 도제 시스템과 강한 인적 네트워크로 이뤄져 있다"며 "다른 업계로 갈 각오가 아니라면,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험을 쌓는 것과 별개로 정당한 노동환경을 보장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어느 분야, 현장이든 노동법이 지켜져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관리·감독 의무를 갖는 당국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