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서거]한국 정치사 큰 족적 '거산' 김영삼

머니투데이 박경담 기자 2015.11.2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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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YS, 14대 대통령·민주화운동 지도자·9선 국회의원…정치 여정 반세기

 '폐렴 투병'을 해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표지로 한 새해 연하장을 주변 지인들에게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연하장에는 "기쁜 성탄과 신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2014.12.17/뉴스1  '폐렴 투병'을 해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표지로 한 새해 연하장을 주변 지인들에게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연하장에는 "기쁜 성탄과 신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2014.12.17/뉴스1


22일 향년 88세로 서거한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 증인'이다.

1927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5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정계 입문 두 달 후 손명순 여사와 결혼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제 3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6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여당 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시작한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자유당을 탈당해 길고 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한다.



김 전 대통령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68년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향토 예비군을 설치하자 향토예비군법 폐지안을 발의하고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69년 초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던 김 전 대통령은 자택 은근에서 괴환들에게 습격당했다. 일명 '초산테러'라고 불린 당시 사건을 두고 김 전 대통령은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하며 박정희정권과 갈등을 더욱 키워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당 내 경선에서 영원한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다.
 (서울=뉴스1)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원장 박경국) 소속 대통령기록관은 오는 6일부터 17일까지 옛 대통령 별장인 충북 청원군 청남대에서 "아름다운 동반자 영부인"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사진은 등산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 (안전행정부 제공) 2013.11.5/뉴스1 (서울=뉴스1)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원장 박경국) 소속 대통령기록관은 오는 6일부터 17일까지 옛 대통령 별장인 충북 청원군 청남대에서 "아름다운 동반자 영부인"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사진은 등산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 (안전행정부 제공) 2013.11.5/뉴스1
1974년 '선명야당론'을 기치로 신민당 총재에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강력히 비판했다. 1979년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이유로 박정희정권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원직을 제명하고 가택연금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은 부마 항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결국 유신 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전두환정권에서도 계속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광주5·18 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민주화운동추진협회의를 발족시켜 전두환정권에 맞서 싸웠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로 나타났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영원한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헌제 개헌을 계기로 사이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 모두 나섰으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며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승리를 내줬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것. '3당 합당'으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차기 대선 승리의 초석을 다졌지만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정주영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문민정부를 기치로 내건 김 전 대통령은 32년 간의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군사 정권을 지탱한 하나회를 해체하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실시하며 처벌까지 이끌어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계좌 단속 등 경제 분야에서도 개혁적인 모습 보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임기 말기에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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