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참담함을 견딜 일말의 흔적이나마 찾길 기대하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적어보자. 그 무시당한 남자는 결국 광고지 한 다발을 모조리 버려버렸다. 물론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가장 비생산적인 행위임에 틀림없지만, 벤야민은 “그러한 태업 이외에 다른 방식의 반란은 떠오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오늘이 그때와 다르지 않아서, 나 역시 자의건 타의건 노동자가 노동하지 않는 몇몇 ‘태업’의 사례들을 알고 있다. 예컨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직접 연기한 '구일만 햄릿'(2013년, 권은영·매운콩 연출)이나 콜밴의 노래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오늘날 노동 현실의 맨살―노동자가 제 자리에서 쫓겨났거나, 그들이 제자리에 있기에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에, 투박하고 서툰 것일지라도, 나는 그러한 태업 이외에 다른 방식의 반란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순간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동자들이 “고프다 고프다 배가 고프다/ 아프다 아프다 맘이 아프다/ 서럽다 서럽다 삶이 서럽다”(콜밴, 「고공」)고 노래 부를 때, 무대 위 어떤 이들은 이전과 똑같이 연극하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연극을 이를테면 ‘태업’ 연극이라고 부르기로 해볼까. 단지 내용 때문이 아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연극이 하던 일들에 극이 ‘태만하기’ 때문이다. 이 극에는 서사 전달에 대한 열의가 없으며, 가상의 창조와 몰입의 유도에 대한 욕심이 없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극은 객석 조명을 그대로 둔 채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연극이 개시됨을 알려서 관객들을 극 중 세계로 끌어들이는 그 흔한 장치―암전이나 알람 소리 등―하나가 없다. 배우들은 퇴장 시에 밝은 빛 아래로 무심히 걸어 나가고,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는 한 쪽 구석에 적당히 앉아있다. 배경음악은 물론이고 대사조차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기껏해야 “그물 버려”, “다시 끌어올려”, “게살 절단”, “400g” 같은 단어들, 지난한 육체노동을 분절하고 명명하는 명령어들이 말의 전부다. 그나마 긴 대사는 각자의 개인사에 관한 간단한 고백들인데, 이 말들은 헐떡거리는 숨에 실려 한 단락씩 끊겨 나온다. 기실 말이라기보다는 호흡 그 자체에 가깝다. 이러한 극에서 관객은 이야기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다.
무대 위에는 육체뿐이다. 서사를 태업한 자리에,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노동자들의 육체 자체가 겪는 고통의 묘사다. 연극 대부분의 시간 동안 허리가 굽어진 채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몸을 좀처럼 바로 가누지 못한다. 관객들은 흔들리고 쓰러지는 몸을 본다. 그물을 끌어올리는 배우들의 팔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때, 옷 위로 땀이 배이고 앙상한 골격이 드러날 때, 관객들은 노동자의 육체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엔 그런 상상이 들고야만다. 어쩌면 저 배우들은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을 노동자들의 고통을 연극이라는 가상 세계에 꾸며놓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노동자들의 몸을 제 스스로 겪어보기로 한 것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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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동을 묻는다는 것
노동은 불가피하다. 한나 아렌트가 노동을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인간의 조건')이라고 정의할 때, 그는 삶을 살아간다는 일의 필연성에 노동이 여지없이 포획되어 있음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그러하니 지금 우리가 노동에 대해 무엇인가 물을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기초적인 물음, 말하자면 “우리가 정말로 살아있는가/살 수 있는가”에 대한 확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결국 이 대사는, 적어도 재작년 해고노동자들의 경우에서라면, 실존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생존에 관한 요청으로 읽혀야만 한다. 그러나 몇 번의 계절이 지난 지금 역시도 바뀐 것이 크지 않아서, 여전히 자리 잃은 노동자들은 노래하고 심란한 예술가들은 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