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위험한 대중화 '재벌 혐오'

머니투데이 성화용 더벨 편집국장 2015.09.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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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관객이 봤는데도 여전히 예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 '베테랑'의 주인공은 유아인이다. 또 다른 1000만 관객 영화 '암살'의 주인공이 이정재나 하정우가 아니라 전지현인 것 처럼 , 유아인의 존재감은 황정민을 훨씬 넘어선다. 연기를 잘하기도 했지만 설정된 역할이 워낙 강렬했다. 마약을 하는 재벌2세. 감정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는 악당. 측근들은 온갖 모멸감을 참아내면서 이 젊은 악당의 패륜적 폭력을 덮어주기에 급급하다. 형사와의 대결구도만 보면 '공공의 적' 시리즈와 유사한데, 재벌2세 악당의 컬러가 워낙 선명한 게 이 영화를 히트작으로 만든 포인트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물론 대중들이 이 영화에 몰입하는 배경에는 재벌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다. 최근들어 그럴만한 일들이 많았다. 가까이는 롯데그룹의 형제 싸움이 그랬고 얼마 전으로 가면 한진그룹 여식의 땅콩회항 사건이 그랬다. 이밖에도 재벌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부추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재벌 혐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대중들은 거의 모든 피붙이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등장한 롯데 일가의 후계 다툼을 '실황중계'로 지켜봤다. 돈과 권력 앞에 혈육이 남보다 못한 걸 보며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조현아 사건의 본질은 한 재벌가 여식의 패악질이 만천하에 공개됐다는 것이다. 정도만 다를 뿐 유사한 사건이 숱하게 일어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과 함께 다른 재벌가 사람들도 도매급으로 매도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재벌 혐오가 비이성적으로 과열되는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재벌가 사람들의 도덕적 결핍이 과연 심각한지, 품성에 하자가 있는지, 그 사고와 행위가 몰상식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지 등을 함부로 일반화해 언급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얼마 안되는 유산을 놓고도 남처럼 등을 돌리거나 소송을 해대는 형제들의 험악한 얘기가 서너집 건너 한 건씩은 돌아 다닌다. 재산을 미리 분할해주기 전에는 재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아들 때문에 소유 부동산을 헐값에 팔아치운 칠순 부친의 사례 따위도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이해하려고 마음 먹으면 롯데 형제의 난 쯤은 닳고 닳은 뻔한 스토리에 불과하다. 조현아에 못지 않은 패악의 사례를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찾는 것 또한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장애인이나 미성년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행패는 돈과 지위를 배경으로 한 재벌들의 그것에 못지 않게 추악한 경우가 적지 않다. 덜 유명해 덜 알려질 뿐이다.

'재벌'이라는 카테고리가 대중의 혐오와 분노를 공공연히 소비할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거듭 생각해도 그건 합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모집단을 정해 내밀하게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답이 나올 개연성이 충분하다. 더욱이 재벌은 한국 경제의 주력부대다. 세계는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데, 근대화 이후 50년간 한국경제가 만들어 낸 최첨단의 무기는 좋든 싫든 '재벌'이다. 이 재벌을 통해 누릴 건 누리되, 정서적으로는 혐오하고 증오하겠다는 식의 접근은 인지부조화의 불행한 덫에 빠지게 할 뿐이다.

야당은 최근 당내에 재벌개혁특위를 만들고 국회에도 이를 설치하자고 여당측에 제의했다. 야당은 4개 분야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데,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베테랑'은 그저 재미있는 영화일 뿐, 현실에서의 재벌은 우군이며, 전위부대이며, 긴요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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