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쳐톡톡]도발의 세상 VS 하심의 세상

머니투데이 황인선 문화마케팅 평론가 2015.08.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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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선의 컬쳐톡톡]도발의 세상 VS 하심의 세상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같은 산에서! 금요일 지리산 워크샵 가는 길. 점심 무렵, 우리는 섬진강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강을 내려다보며 막 수다들을 떨려는데 느닷없이 TV에서 ‘북한- 내일 오후 5시 반 도발, 선전포고’ 긴장된 목소리 뉴스가 흘러나왔다. “서울로 가야 되는 거 아냐?”, “상투적인 수법이잖아...” 소리들을 하며 밥인지 불안인지를 먹었다.

나는 30년 전이 떠올랐다. 1983년, 여름방학을 맞아 대학교 친구들과 지리산을 거쳐 여수로 가기로 했던 때다. 낑낑거리며 산을 오르다가 지리산 중턱에서 커피 한 잔 하려는데 갑자기 엄청난 사이렌 소리와 “실제상황입니다.” 방송 소리가 산을 흔들었었다. 북한 공군장교 이웅평이 비행기를 몰고 망명을 했던 때다. 스무 살 우리는 혼란과 불안감 속에 등산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왔었다. 내가 지리산을 찾은 건 단 두 번. 이제 32년이 흘러 다시 지리산을 갔건만 그때와 비슷한 일이 또?



그래도 이번에 우리는 워크샵을 계획대로 했고 다음날 지리산 깊은 곳에 있는 상훈사 절로 갔다. 변변한 절 안내판도 없으나 산색이 깊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옥 소리처럼 청량하다. 전쟁, 도발, 사이렌 소리... 흥분한 앵커와 군사전문가 목소리가 이곳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본당 입구에 내 눈을 바로 잡은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하심(下心)! 일본어에서는 이 단어를 ‘속셈’이나 ‘나쁜 음모’로 쓰지만 이 절에서는 아래로 내리라는 동사의 뜻일 것이다. 마음을 아래로 향하게 해라. 도발하지 마라. 여기는 업데이트, 업그레이드, 업셋 세상이 아닌 다운의 세상. 마음도, 짐도, 업보도 내려놓아라. 그런 가르침이 바로 마음에 꽂혔다. 그 하심의 세상에 가면 분위기, 법도, 도상과 언어 체계가 다르고 삶의 화두가 다르고 무엇보다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상훈사 절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간다. 거기는 9 to 6가 아니라 5 to 9이다. 새벽 5시에 첫 예불을 올리고 저녁 9시에 잠든다. 이 모든 것은 목탁 소리에 맞춰 행해지며 목탁은 나무 물고기 즉, 목어에서 유래하는데 목어는 도를 향해 자지 않고 정진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절에서는 행위의 의미도 달라진다. 먹는 것은 신성한 일이며 그래서 음식을 남기면 안 되고 설거지도 용신제(龍神祭)라고 부른다. 설거지한 물이 용신이 사는 물로 간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우리는 절의 시간과 의미 속에 스스로를 맡겼다. 3배 예불을 하고 마음을 잠시 가다듬은 후에 남자들 7명은 절 뒤 산으로 가서 잘라놓은 나무둥치들을 트럭에 날랐다. 큰 나무는 굴리고 작은 나무는 들어 두 시간 일하니 한 트럭이 꽉 찼다. 이걸 절에서는 운력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하는 울력을 말함인데 이를 통해 세상 잡사를 머리에서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여자들은 이 시간에 포행을 하는데 양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내리깐 채 발뒤꿈치를 먼저 대어 천천히 산길을 4-5시간 걷는 수련이다. 그런데 절에서 말하는 이 포행은 정확한 한자어가 없다. 사전에서는 경행, 보행으로 갈음해서 해석한다. 절에서는 앞에 말한 운력, 용신제도 사전의 의미와는 다르게 쓰고 있었는데 그럼 어떠랴.

우리는 언어 너머의 세상에 있는 것을. 비록 하루지만 여기 온 처사와 보살들은 말을 줄였고 목소리를 줄였다. 대신 느끼려고 했다. 산, 물, 소리, 뜻... 우주를.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말을 중얼거려 본다. 하심! 마음을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아래를 보아라. 도발하지 마라. 내려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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